▲ 내외문화의집.

지난번 걸음을 멈추었던 생명과학고를 나와 왼쪽에 있는 '내외문화의집'으로 간다. 횡직선 무늬의 알루미늄 패널을 붙인 은백색 벽에 파란색 종직선의 각진 기둥 3개와 양옆에 파란색 사다리를 세운 것 같은 출입문 그리고 '내외문화의집'이라 쓴 고딕의 파란 글씨가 서로 잘 어울리는 건물이다. 눈여겨 보는 이는 별로 없겠지만 생명고쪽 벽에 종횡의 검은 직선으로 크고 작은 사각형을 만들어 그 안에 핑크와 살색, 옅은 고동과 회색을 칠한 것과 함께 몬드리안의 모던함이 떠올려지는 디자인이다. 5억9천만 원(국비 2억3천만 원)으로 예전의 내외동사무소 건물을 전면 리모델링해 1988년 7월 13일에 개관했다. 문광부의 보급사업으로 전국에서 19번째, 김해에서 2번째로 탄생했던 복합문화서비스 공간이다.
 
▲ 개구리 모자상.
가까운 거대 아파트단지에서도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라 분기별로 개최되는 교양강좌에 대한 호응도 높다. 하루 300여 명이 드나드는 입구의 쌈지마당에는 물레방아와 분수대도 있었지만, 등나무 그늘과 잔디밭만 남은 지금이 오히려 더 깔끔하다. 나무그늘 떨어지는 잔디에는 백색 화강암의 개구리 모자상이 있다. '혹시, 청개구리?'란 짓궂은 생각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지난해에 새로 '내외작은도서관'이 들어섰다는데, 1층에는 안내와 정보자료실, 인터넷과 비디오부스, 문화 사랑방과 창작실 등이 있고, 2층에는 개인연습실과 문화관람실이 있다. 수채화, 서예, 시창작, 기타하모닉스, 풀룻앙상블 같은 동호회들이 대관 신청을 통해 연습도 하고 공연도 선사한다. 지난달 4일부터 시작된 교양강좌에는 노래교실, 요가, 한지공예 같은 성인반과 데생과 한자교실 같은 초등학생반이 운영되는데, 담당인 김미정 선생은 시민들의 좋은 반응을 자랑하고 있다. 다만 언제나 손이 부족해 자원봉사회원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단다. 애써 만든 좋은 공간인데, 관리와 운영에도 적극적인 투자가 있어야겠다.
 
2005년 6월에 재개원한 김해사랑병원이 바로 옆에 있다. 인제대를 졸업한 김형진 원장의 정형외과에서 시작해 내과와 외과를 아울러 갖춘 전문병원이다. 병원 홈페이지에 게재된 환자들의 수술체험기는 우선 병원의 홍보를 위한 것이겠지만, 걱정부터 앞서는 환자에게는 많은 위로와 참고도 되는 모양이다. 병원을 찾기도 전에 치료가 시작되는 느낌이란다.
 
병원을 바라보고 오른쪽 금관대로 1265번 길을 조금 오르면 첫 번째 교차로 오른쪽 모퉁이에 대원정사란 간판을 단 나트막한 기와집이 있다. 실례를 무릅쓰고 담 너머를 기웃거린다. 왼쪽 블럭 담 앞에 깨진 돌이 덮인 흙바닥이 있는데, 여기에 바로 2천500년 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내외동의 타임머신이 묻혀 있다. 도기념물 97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는 내동지석묘(支石墓·고인돌) 유적이다. 1976년 1월 부산대박물관의 조사 때만 해도 모두 3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저 아래 있는 것이 유일하다. 2천500년 전의 내외동을 증언해 줄 유일한 증인이다. 경운산 자락의 이 근처에는 수많은 지석묘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밭이 경작되고 마을이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모두 파괴 소멸되었다.
 
여기가 3호 지석묘(내동 469·금관대로 1265번 길 4-1), 맞은 편 자광암 근처에 2호 지석묘(내동 473-2·금관대로 1265번 길 6-5), 200m 떨어진 곳에 1호 지석묘(금관대로 1265번 길 5-7 부근)가 있었다. 1호만 발굴조사되었고 2호와 3호는 집과 벽 아래에 묻혀 있어 관찰만 할 수 있었다. 1호에서는 세형동검(細形銅劍), 흑도(黑陶), 무문토기(無文土器)와 홍도(紅陶)의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동검과 흑도로 보아 기원전 4~3세기의 유적으로 추정되었다. 2호는 1985년 11월에 상석과 지석이 소실돼 동의대박물관이 긴급 발굴했다. 홍도, 돌대문호(突帶紋壺)·무문토기·마제석촉의 파편과 백자완이 출토되었는데, 백자완은 조선시대에 고인돌의 큰 바위에 치성을 드렸던 것이지만, 몸통의 돌출 띠가 특징인 돌대문호의 파편은 일본의 야요이토기로 생각되고 있다.
 
▲ 문화의집 생명과학고 쪽 벽화. 몬드리안의 모던함이 떠오르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기원전 3세기 경의 왜 계통 토기가 출토됨에 따라 2천300년 전에 대한해협을 건너던 김해지역과 큐슈 북부의 교류를 짐작케 하였다. 이제 혼자 남아 내동지석묘로 불리는 3호는 1996년 9월 건물신축때 민원으로 조사됐다. 내부에서 무문토기와 돌대문토기의 파편, 개석(蓋石·뚜껑돌) 위에서 홍도와 꼬막껍데기가 출토됐다. 홍도와 꼬막은 개석을 덮을 때 행했던 제사의 흔적이다. 지석묘로서는 아주 드물게 사람의 하악골과 상완골 편이 검출됐다. 2천600년 전의 '내동사람'이다. 워낙 작아 숙년의 나이는 확인했지만 성별은 알 수 없었다. 근년의 조사 예를 보면 1·2·3호는 위가 넓고 아래는 좁게 2단으로 땅을 파서 아래에 석곽 등으로 주인공을 안치해 개석을 덮고, 그 위와 둘레를 돌들로 채워 지석(支石)을 괴고 상석을 올리는 스타일의 고인돌이었다. 3호의 상석은 발굴조사 후에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옮겨져 박물관 앞마당 정자나무 아래에 전시되고 있다.
 
2006~2008년에 발굴된 구산동유적의 거대지석묘(내부 미조사)와 대규모의 청동기문화마을이 경운산과 평행하게 비슷한 레벨로 이어져 이 유적 또한 전북 고창의 세계문화유산 고인돌무리에 필적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구산동유적에서도 같은 왜 계통의 토기들이 대량으로 출토돼 2천500년 전에 활발했던 일본과의 교류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 홀로 남게 된 내동지석묘를 지키는 강아지가 있다. 그래서 담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다 깜짝 놀랐다. 지난번엔 자고 있던 녀석이 오늘은 벼락같이 짖어댔기 때문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래, 너라도 좀 잘 지켜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남기고 돌아섰다.
 
▲ (위)하늘을 찌를 듯한 빨간벽돌 목욕탕 굴뚝/ (아래) 소바우공원.
붉은 벽돌 목욕탕 소정탕의 거대한 굴뚝이 새파란 가을 하늘을 찌르고 있다. 소정탕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비탈길을 몇 블록 올라가다 보면 담쟁이가 울긋불긋한 내동중학교의 담벼락을 만난다. 오른쪽으로 조금 가다 내동공원 맞은 편의 정문을 들어서는데, 저만치에 내동중학교라 쓴 하얀 건물에 여러 줄기의 콩나무가 떼를 지어 기어오르고 있다. 옆을 보니 산림청 지정의 '2011년 학교숲 조성학교'란 간판이 있다. "아하,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992년 3월 개교의 내동중학교는 정병식 교장 이하 75명의 교직원들이 29학급 953명(여 406명)의 학생들과 공부하고 있다. 김해외고에도 5명이나 합격시켰다는데 줄기차게 기어오르는 콩나무처럼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모양이다. 드물게 특별활동에 한국화반이 있어 활동사진을 찾았더니 잘 아는 수묵화 작가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지인을 만나는 쑥스러움에 실소가 터졌다. 얼른 옆의 초등학교로 걸음을 옮긴다.
 
1990년 3월 개교의 내동초등학교는 신용환 교장 이하 58명의 교직원들이 27학급 695명(여 341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는데 깜짝 놀랐다. 잘 꾸며진 공원이나 부잣집 정원같은 마당 때문이었다. 정문에서 교실로 통하는 길에는 목재데크를 깔고 정원수와 잔디, 그리고 화단을 적절히 배치했고, 담장과 운동장 사이도 데크와 붉은 타탄을 깔고 벤치, 시소, 알록달록한 놀이기구들을 단풍 들기 시작한 나무들과 화단 사이에 앉혔다. 새로 된 정원이라 조금 엉성하지만 이런 길로 다니고 여기서 뛰노는 아이들은 분명 다르게 자라날 것 같다. 남을 괴롭히는 아이나 쉽게 목숨을 포기하는 청소년이 될 리는 없을 것 같다. 마침 화단에 물주고 있는 수위아저씨와 체육선생님께 물었더니 지난 해 3월에 경상남도 그린스쿨(친환경학교)로 지정되었고, 거기에서 얻은 예산으로 이렇게 꾸미게 되었단다. 지난번에 들렀던 시멘트옹벽의 다른 초등학교와는 딴판인 녹색학교에 감동했고, 남다른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이 행복해 보였다.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함께 인공잔디가 아닌 흙바닥운동장으로 남긴 것도 같은 연유였으면 했다. 초·중학생 정도까지는 인조잔디보다는 흙먼지를 날리며 뛰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동초등학교 정문을 나서 비탈길을 따라 금관대로에 내려선다. 남쪽 몇 블록 아래 서김해새마을금고가 있는 평전사거리가 있다. 평전이란 평평할 평(坪), 밭 전(田)이니, 과거에는 여기서 동쪽으로 외동을 지나고 해반천을 건너 회현동의 봉황대까지가 전부 논밭이었던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1970년대 중반의 사진에도 낮은 봉황대가 오히려 솟아 보일 정도였고 그래서 평지마을로도 불렸던 모양이다. 금관대로를 건너 송이공원을 지나고 모든민족교회(1982.4, 대한예수교장로회, 최정철 담임목사)를 지나면 길 건너에 소바우공원이 있다. 엊그제 생긴 쌈지공원이지만 내외동의 역사가 이름으로 남았다. 원래 쇠바위(金岩)였던 것이 소바위(牛岩)로 되었고, 바위는 바우로 된 것인데, 내동의 중심마을이었던 우암리의 이름이 이렇게 남았다. 공원 앞의 우암로, 연지공원 맞은편의 우암공원, 그 옆의 우암초등학교도 그런 이름이다. 내동의 중심마을이었던 같은 이름이 하나는 우리말로 소바우로, 또 하나는 한자말의 우암으로 표기돼 양쪽 공원에 다른 이름처럼 남았다.
 
▲ 숲 공원을 연상케 하는 내동중학교 교내 전경. 담벼락엔 담쟁이가 울긋불긋 뒤엉켜 있고 본관엔 콩나무 줄기가 떼를 지어 오르고 있다. 내동중은 산림청 지정의 '2011년 학교숲 조성학교'이다.
소바우공원에서 남쪽으로 우암로를 따라 경운초등학교로 향한다. 건영아파트(1998.12, 558세대)와 현대3차아파트(1998.4, 376세대)를 지나, 현대4차아파트(1998.6, 419세대)의 정문 앞에서 내외로 11번길로 접어든다. 저 앞에 옹기조각 타일장식과 삼각형 첨탑이 옛날 예배당같이 정겨운 내외동교회(1990.6, 예수교장로회, 예종길 담임목사)가 보이는데, 그 앞이 경운초등학교다. 1996년 9월 개교로 37학급 1천76명의 학생과 2개반 28명의 유치원생들이 김용두 교장 이하 59명 교직원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교육목표로 제시된 도덕인, 창조인, 자주인, 건강인의 압축된 용어가 눈길을 끌고 '신나는 줄넘기' 프로그램으로 '달인' 등의 급수제와 대회를 통해 학생을 단련한다. 금년 8월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시 나가하마소학교 학생들의 방문사진이 이채로웠다. 담당하시는 김소영 선생님께 물었더니, 벌써 1999년부터 지속돼 온 한일교류프로그램이란다. 상호 30여 명 정도의 학생과 교사들이 해를 바꿔가며 교환 방문하는데 일본 측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단다. 어린이들의 한일교류도 신기하지만 상대가 시마네현이고, 이즈모시라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시마네현은 일본에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전진기지 같은 곳이고, 이즈모시는 고대 일본에서 1/4의 비중을 가졌던 곳으로 가야와 신라에서의 이주민과 문화전파의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마네현청에는 타케시마(竹島)자료관이 있고, '독도여 돌아오라'는 표지판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나가하마소학교가 있는 곳의 지명은 아라카야쵸(荒茅町)로 함안 아라가야와의 관련이 자주 언급되는 고장이다. 더구나 이즈모시 동쪽에는 부뚜막신앙을 가지고 이주했던 가야인이 도착한 항구와 거슬러 오른 강의 이름, 그리고 종착지인 가야부뚜막신사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탁함도 굴절도 없는 어린시절부터의 교류를 통해 과거와 현실 모두를 함께 살피면서 한일양국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켜갈 수 있는 인재를 키우고, 양국의 선입관이나 오해를 풀어갈 수 있는 희망을 키우는 현장적 교육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정문을 나서 왼쪽의 선학공원을 가로질러 우암로 건너에 있는 경운중학교를 찾는다. 2001년 3월에 개교한 37학급 1천181명(여 616명)의 학생들이 김정복 교장 이하 77명의 교직원들과 공부하고 있다. '행복한 도서관 만들기' 프로그램이 눈에 띄고, 개교 때부터 교기로 지정된 태권도부의 활동이 활발하다. 2006년 대회부터 성적을 내기 시작해, 지난 해 5월에는 제37회 전국중고등학교태권도대회에서 1·3위를 차지했고, 8월의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도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 경운중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동아1차아파트(1997.1, 720세대)를 지나 내외동주민센터에 이르렀지만 오늘 역시 계획의 반의반도 못 왔다. 오늘은 또 무슨 수다가 그리 많았던 걸까?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시내는 다 돌 수 있을까? 감상과 의견의 무자비한 다이어트를 다짐해 본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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