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 외국인 거리 르포

멀리 '서울 이태원'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다양한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체험해 보고 싶다면 김해의 원도심인 동상동, 서상동, 부원동 일대를 거닐어 보라. 당신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느끼게 될 것이고, 이상야릇한 '데자뷰(처음 보는 대상을 두고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현상)'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는 곳, 정식 명칭으로는 '종로길'인 이 일대를 김해 사람들은 '외국인 거리'라 부른다. 현재 김해에서 생활하는 등록 외국인은 1만 3천여 명. 미등록 외국인까지 합치면 그 수는 3만 명을 훌쩍 넘어 선다. 이들이 4~5년 전부터 쇼핑, 식사 등을 위해 일정한 공간으로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외국인 거리'다. 주말이 되면 이 '외국인 거리'에는 인근 부산, 창원 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까지 몰려와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룬다.   
 

◆ 한국 아줌마 뺨치는 외국인

"자~ 오이소, 오이소. 싸게 드립니더."
"총각, 뭐 필요한교? 한 번 둘러보고 가소."
"신선한 닭 한 마리가 5천 원도 안합니더."
지난 달 14일 오후 김해 동상동 재래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서 흥정이 한창이다. 한 야채 가게 앞. 스리랑카에서 온 플라사바(29·장유면) 씨가 양파 한 망을 들고 있다. "단골손님인데, 500원만 깎아주이소." "아휴, 어떻게 더 싸게 줘." 주인아줌마와 옥신각신 하는 품이 웬만한 '한국아줌마'는 저리가라다.
이 가게에서는 일반 채소가게에서 보기 힘든 외국산 채소들도 눈에 띈다. 상추와 생김새가 비슷한 '까이짱', 베트남 식단에 빠짐없이 오르는 '라우다이', 아보카도, 파파야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벌써 30년넘게 이 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가게 주인 최모(65·여)씨는 "외국인 손님이 매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며 "이들을 위해 외국산 농산물을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농가에서 도매로 채소를 사온다"고 말했다.

인근 생선가게. 황금빛 향어가 대야 안에서 헤엄치고 있다. 그 뒤로 고등어, 갈치, 멍게 등이 동그란 플래스틱 접시에 쌓여 있다. 베트남에서 온 리반단(40·한림면)씨는 잉어요리를 하기 위해 가게에 들른 참이다. 리반단씨는 팔뚝만한 잉어 한 마리를 골랐다. 주인은 맨바닥에 쪼그려 앉더니, 잉어를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손질을 한다.

생선가게 바로 맞은 편에는 닭집이 있다.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닭고기는 국적을 불문하고 카레, 볶음밥 등 다양한 재료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이 잘린 닭들이 일렬로 가판대 위에 정렬되어 있다. 1주일 치 먹을거리를 사러왔다는 베트남인 롱이(23·동상동)씨는 "신선한데다 가격도 싸서 매주 이 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현재 이 재래시장을 이용하는 손님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이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있고, 귀화인들도 있다. 특히 주말이면 1천500~2천여 명의 외국인들이 이 곳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쇼핑을 한다. 그래서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외국인들은 '반가운 손님'이다. 4~5년 전 홈플러스, 탑마트같은 대형마트가 들어서자 상권은 급격히 시들어 버렸는데, 이 외국인들 덕에 그나마 숨통이 틔었기 때문이다. 3대째 이곳에서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김해수산 김광진(37) 사장은 "외국인 손님들이 없었으면 가게는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 외국인들 사이 인기 '할랄음식'

재래시장에 외국인들이 몰려들자 동상동과 인접한 서상동에도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재 이 일대에 자리 잡은 외국인 식당만 해도 줄잡아 30여개가 넘고, 현지 요리사가 직접 음식을 조리한다.
 
인도네시아 음식점도 있고, 베트남 음식점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할랄음식점'이다. 할랄(HALAL)은 동물을 죽이기 전에 기도를 하고 피를 모두 빼낸 고기를 말한다. 따라서 이 음식점에서는 고기를 엄격하게 취급한다. 1년 전 할랄음식점을 연 모로코인 아이론(30·주촌면)씨는 "할랄마크가 찍힌 오스트레일리아 수입 고기만 사용한다"며 "한국에서 나지 않는 채소는 부산 사상에 있는 이슬람 가게에서 사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 곳에서 가장 인기있는 메뉴는 야채를 곁들인 양고기 소스와 닭고기인데, 양고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과 무슬림들이 자주 찾는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채소를 수입하는 곳은 여기 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음식점에서도 베트남 음식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채소 '샹차이'를 구입하고 있다. 베트남인 부인을 둔 조용언(45) 사장은 "김해지역 비닐하우스들 가운데에는 수입야채를 재배하는 곳이 있다"고 귀띔했다.
 
식당들 사이에 자리잡은 핸드폰 가게도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한 핸드폰 가게 앞에는 'No china. Original(중국산 아님. 정품입니다)' 'You can buy iphone 4(아이폰 4 구입가능)'같은 메시지가 유리벽에 붙어 있다. 그 사이로 핸드폰을 사기 위해 줄지어선 외국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1년 째 가게를 운영한다는 사장 조모 씨는 "주로 외국인들은 카드를 충전해서 쓰는 선불폰을 많이 사간다"고 전했다.
 

◆ 해 저무는 외국인 거리

오후 6시께가 되자 사위가 어둑어둑해진다. 그러자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어딘가로 발길을 재촉한다. 그들이 모여든 곳은 김수로 왕릉공원 인근 사거리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 이곳에서는 이들 대부분이 거주하는 장유, 진례, 주촌은 물론 창원까지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친구를 만나러 창원에서 왔다는 파키스탄인 자미(32)씨는 서둘러 98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즈베키스탄인 골립(30·진례)씨도"빨리 다음 주 일요일이 돌아와 친구들과 놀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상동, 서상동, 부원동 일대 '외국인 거리.' 이 곳에서만큼은, 김해는 '국제도시'로 확실히 자리매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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