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유 반룡산 정상부에 있는 노송과 벤치. 마치 장유의 땅을 오랜 시간 넌지시 굽어보고 있는 듯하다. 반룡산은 용이 도사리고 있는 형국을 해 이름 붙여졌다.  사진=최산·여행전문가 tourstylist@paran.com

입춘을 지나며 매서운 한파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소한, 대한을 넘기면 추위도 한풀 꺾인다더니, 봄의 기운을 한 치도 허락하지 않는 입춘 즈음이다. 겨울의 진면목을 새삼 절감하며 장유로 향한다.
 
이번 산행은 '장유의 남산', 반룡산을 오른다. 반룡산은 산세가 용이 도사리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임진년 입춘'을 '용의 기운'으로 맞이하기 위해 준비했다. 반룡산은 장유지역의 정중앙에 있으면서 신문리, 삼문리, 관동리 등 여러 마을을 거느리고 있어, 예부터 장유의 남산 역할을 하고 있는 산이다. 풍수학자들은 지리산의 정기가 용지봉, 불모산을 통해 이곳 반룡산에서 치솟아 오르는 '장유의 혈(穴)' 자리로 중히 여겼다.
 
산행은 반룡산공원 춘화곡지구를 들머리로 하여 전망바위~체력단련장~능선~정상~죽림마을로 내려오는 반룡산 남부코스다.
 
장유 관동리 반룡산공원으로 가는 길. 찻길에서 보면 대박공인중개사 간판이 보인다. 그 골목으로 들어서면 입구에 '화산재 입구'란 빗돌도 보이고 '하모니어린이집'도 보인다. 조금 오르다 보면 '반룡산공원(춘화곡 지구)'이라는 큰 표지석이 서 있다. 이곳이 산행 들머리다.
 
원래 반룡산공원은 '춘화곡(春花谷)'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자연부락이었다. 장유면 전체가 그러하듯 이곳도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마을이 사라졌다. '봄꽃이 제일 먼저 피는 마을, 춘화곡'을 상상하며 공원을 오른다.
 
▲ 반룡산공원으로 바뀐 춘화곡 지구.

겨울이라 공원은 을씨년스럽다. 그래도 인공시냇물과 폭포를 만들어놓고 이팝나무 군락지, 장미원 등도 조성해 놓았다. 장미원에는 미스터 블루, 몬타나, 오렌지센세이션 등 각국의 장미나무가 식재되어 있어, 장미꽃이 피는 계절이면 형형색색의 꽃들로 뒤덮히겠다.
 
공원 전망대에서 '마음속에 핀 장미꽃 길' 따라 공원을 내려다본다. 불모산 마루금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서있고, 공원을 에워싼 소나무 숲은 옛 춘화곡의 따뜻한 마을기운을 품고 있는 듯 온화하다.
 
공원을 뒤로하고 산길로 접어든다. 처음부터 경사가 있다. 나무계단과 흙길이 함께 산을 오른다. 계단길이든 흙길이든 오르는 일은 같은데, 사람들은 그 길의 '호불호(好不好)'를 따진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어떤 길을 어떻게 도달했는지는 우리 인간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겠다. 한 인간의 '삶의 복기(復棋)' 차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계단길과 흙길을 번갈아 밟으며 길을 오르니, 부영아파트 등산길과 만나는 능선에 다다른다. 첫 봉우리인 전망바위를 향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소나무 능선길이 펼쳐지는데, 가지마다 호젓함이 묻어있다. 발치에는 졸참나무 낙엽들이 뒹굴고 좁은 산길은 굽이굽이 휘돌아 끊어질 듯 이어진다.
 
▲ 춘화곡은 봄에 꽃이 제일 먼저 피는 마을이라는 것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아래 사진은 반룡산 등산로를 뒤덮고 있는 낙엽과 필자의 모습.

전망바위에 선다. 멀리 신어산, 분성산, 임호산, 경운산, 칠산 등의 능선이 조망된다. 잠시 서 있는데도 귀를 에듯 바람이 거세다. 어느 봉우리든 정상에는 바람이 많다. 오르는 길과 내리는 길 중간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정점(頂點)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만큼 '삼라만상' 중 가장 외롭고 허허로운 곳이 '정상'이라는 곳이다. 홀로이 찬바람 맞다가 필히 다시 내려와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체력단련장 쪽으로 다시 길을 잡는다. 잠깐 능선이 이어지다 가족무덤이 있는 곳으로 내리막을 탄다. 갑자기 바람이 잔다. 볕만 따뜻하게 양지 녘을 비춘다. 오호라, 남향이다. 유택이 남향에 자리하는 이유를 새삼스레 깨닫는다.
 
곧이어 체육단련장. 정상으로 가는 길과 부영아파트, 춘화곡 지구, 누가병원 방면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오른쪽 양지 바른 곳에는 전주이씨 가족묘가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다. 산 곳곳에 가족묘가 조성된 것만 봐도 이곳 반룡산의 풍수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 반룡산 정상으로 가는 길목 갈림길에 있는 이정표와 전주 이씨 가족묘.
정상으로 향한다. 길가로 산비둘기 깃털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고, 바람은 더욱 거세게 황소울음을 운다.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민다. 이 거친 바람 뒤에는 따뜻한 훈풍의 봄이 뒤따르기에, 모든 생명들이 겨울바람을 맞고선 것이리라.
 
본격적인 능선을 타며 얼마간 편안한 걸음이다. 마을 뒷산 오솔길 같다. 이리 휘고 저리 굽어 걷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급한 곡각 길에 문득 고개 들어보니, 불모산 마루금이 눈썹 위에 걸렸다. 장유의 수호산답게 바라보는 이를 일거에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봉우리를 지나 화촌마을 갈림길. 벤치 2개 놓여있고 정상으로 향하는 소나무 능선길이 실오라기처럼 굽이굽이 이어진다. 힘들다 싶으면 편안한 길을 내어주고, 지루하다 싶으면 한 고개씩 높여준다.
 
그 길 따라 가끔씩 금강송들이 뿌리를 드러내고 가는 길을 막고 섰다. 뿌리를 계단삼아 계속 길을 오른다. 잠깐 급한 고개. 그 고개를 두어 숨에 넘으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정상이다.
 
반룡산(268m) 정상은 둥근 마당 형태다. 마치 떡시루 같다. 그래서 반룡산을 '증봉(甑峰), 시루봉'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장유지역이 모두 물에 잠겼을 때 반룡산 정상만 실오라기만큼 물에 잠기지 않았다 하여 '실봉산'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정상 중앙에는 국립건설연구소에서 세운 소삼각점이 있고, 그 옆으로 김해김씨 묘비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소나무 몇 그루, 한파의 바람 속에서도 그 푸른 잎이 더욱 청청하다,
 
사방을 조망한다. 장유신도시 쪽으로는 남해고속도로 장유인터체인지와 아파트 군락이 보이고, 그 뒤로 무척산이 어렴풋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김해 시가지 쪽으로는 언제나 든든한 신어산과 시가지를 품고 있는 분성산이 버티고 있고, 임호산과 함박산은 제 산줄기 다 드러내고 함초롬히 드러누웠다.
 
서부칠산동 쪽으로는 드넓은 김해평야가 끝없이 펼쳐지고, 평야 사이로 칠산이 오똑 서 있다. 그 사이로 율하천이 조만강과 합수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옛날 이 율하천 앞은 배가 드나들었던 바다였었다. 한때 신문진(新門鎭)이라는 군사진영이 주둔하기도 했다. 그 뒤로 가락 오봉산도 보이고 초선대도 살짝 드러난다.
 
▲ 정상 중앙에 있는 소삼각점.

김해평야에서 불어오는 큰 바람에 급히 하산을 한다. 정상 안부에 있는 산림초소에서 왔던 길을 버리고 왼쪽 죽림마을 쪽으로 길을 잡는다. 초소 옆 오리나무 한그루. 거의 죽음에 이르렀는데도 열매를 달고 겨울을 나고 있다. 남쪽 줄기 쪽으로는 운지버섯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검버섯 난 얼굴에 저승꽃 피우듯, 서로 공생하고 있는 모습에 잠시 숙연해진다.
 
산길을 내려서니 새로 조성하는 가족 묘지가 나오고, 조금 더 내려가니 임도와 맞닿는다. 남쪽으로 난 하산 길에는 따뜻한 햇볕 한 줌 반짝이고 있다. 그 길 따라 도열한 단감나무들은 아직도 겨울잠을 자고 있다.
 
얼었던 임도가 녹아 질척인다. '봄의 기운인가?' 생각하다 마주친 오리나무 한 그루. 가지 끝에 물이 올라 파랗게 잎눈을 틔우고 있다. '아! 입춘이다.' 탄성을 지른다. 입춘산행에 입춘의 길목을 본 것 같아 반갑다. 자연의 조화 속은 아무도 말릴 수 없음이다. 마삭덩굴 빨간 잎 사이로 파란 맥문동도 봄을 준비한다. 길가 상수리나무도 기지개 켜며 제 물관 여는 소리 들린다. 그렇게들 모두가 겨울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터덜터덜 날머리인 죽림마을로 들어선다. 조선시대 역참인 '적항역(赤項驛)'이 있었던 마을. '역마을'이라 불리다가 대밭이 많아 죽림마을로 고쳤다 한다. 이미 이곳은 오후의 햇빛 속에 봄의 기운이 완연하다. 한적한 마을 낯선 이의 방문에 개 한 마리 짖고, 새끼 밴 염소가 한가로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매화나무에는 앙증스런 꽃눈이 빨갛게 달렸다. 몇몇 집 굴뚝에는 벌써 밥을 짓는지 솔가지 태우는 냄새가 구수하다. 그렇게 봄은 휘적휘적 마을 고샅길 따라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Tip. 시집간 딸과 친정 어머니 눈물의 해후

우리의 세시풍속 중 '만날제'란 풍속이 있다. 시집간 여성들이 한가위 다음날 하루 외출을 허락받아 친정과 시댁의 중간지점에서 모녀상봉의 회포를 풀었던 풍습이다. 이날 친정어머니들은 출가한 딸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였고, 딸도 어머니를 대접하고자 시댁음식을 몰래 장만하여 미리 정한 고갯마루, 징검다리, 나루터 등에서 상봉을 하였던 것이다.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 장유에는 반룡산과 방구산 등의 정상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오랜만에 만난 모녀들이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다. 그 인파로 인해 산고개가 하얀 옷을 입은 여인들로 가득했다고도 전해진다.
 
1970년 초까지 계속된 만날제는 '중로상봉 반보기'라 했는데 '중간에서 만나 반만 본다.'는 뜻으로, 친정과 시댁의 중간쯤에서 반나절만 만나고 되돌아가야 했기에 회포를 반만 풀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여인들의 애절함이 절절했던 풍속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날에는 장사꾼들이 모여들면서 옷감과 옷가지, 화장품, 노리개, 과자, 어린이장난감 등을 판매하는 노점이 들어서 작은 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인근지역에는 창원과 진해 사이의 안민고개, 마산 월영동의 만날고개, 창원 북면의 백월산 등에서 만날제가 행해졌다.
 
그 시절 장유에 거주했던 중년층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장유지역 한가위 세시풍속인 '반룡산 만날제'는, 1970년대에 자취를 감춘 것을 지역 문화단체와 지역민들에 의해 지역문화행사로 다시 부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최원준 시인/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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