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의 시작부터 마음이 급하다. 지난번에 마무리 짓지 못한 장유의 일부와 주촌면 전체를 다 돌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예고대로 오늘의 발걸음을 장유고등학교에서 시작한다. 지난 2001년 3월 개교 당시 학생 충원을 고민해야 했지만, 11주년을 맞이하며 '2011년 교육평가'에서 경남 78개교 중 5위의 명문고로 성장했고, 이제는 입학의 어려움을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33학급 1천290(남 552)명의 학생들이 대학진학과 사회진출을 위해 정규상 교장 이하 76명 교직원들과 매일같이 씨름하고 있다. 지난 설날천하장사를 차지한 이슬기 선수가 바로 씨름을 교기로 하는 이 학교 출신이다. 인제대 이만기 교수의 지도를 받고, 현대삼호중공업에 입단해 2011·2012년 천하장사를 연패했다.
장유고와 함께 개교한 이웃의 월산초등학교에선 35학급 999명 학생과 4개반 110명의 유치원생들이 안병록 교장 이하 79명 교직원들의 보살핌으로 자라나고 있다. 독서방송·독서인증제·독서마라톤대회 등의 '꿈을 가꾸는 독서교육'은 개교 이래 지속하고 있는 특색교육활동이다. 홈페이지를 가득 메운 엄마 아빠들의 독후감을 훑어보다 '참교육'이란 말이 떠올렸다. 월산초등학교 한 블록 건너엔 이름에서 50점 따고 들어가는 석봉초등학교가 있다. 지난 2004년 3월 개교로, 34학급 977(남501)명의 학생과 3개반 63명의 유치원생들이 박기태 교장 이하 69명의 교직원들과 함께, 에너지절약·독서·노래·건강·녹색환경 같은 다양한 주제를 꼭꼭 채운 스케줄에 따라 알뜰하게 실천하는 학교다. 학교의 교정과 둘레를 '무지개 숲 탐방코스'로 설정해 아이들이 탐방로를 따라 꽃과 식물을 관찰하고, 교사에 제비콩을 기어오르게 하며, 낙엽을 치우고 나뭇가지를 치면서 이름표를 달아주는 프로그램이다. 자연과 친근하게 자란 아이들이 잘못될 리 없다.
팔판문화회 등의 활동으로 장유의 역사와 문화 발전을 고민하는 정철석 법무사 사무소의 간판이 커다란 국민은행 장유점 앞 길 건너로 장유순례를 시작했던 면사무소와 석봉마을 대동1단지(2000.7. 998세대)·부영9단지(2002.5. 1천578 세대)가 보인다. 장유 신도시 탄생의 상징 같은 코아상가 앞에서 장유로를 건너면, 지난 1922년 6월 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해 90주년을 맞이하는 장유초등학교가 있다. 명곡 '그네'의 작곡가 금수현 선생이 직접 작곡한 교가가 자랑스럽다. 지휘자 금난새 씨의 부친이기도 한 선생은 김해 대저에서 출생한 인연으로 교가를 작곡해 주셨던 모양이다. 지난 1982년 4월에 지금의 자리에 신축이전했던 오래된 교사와 지난 2006년 개관의 신관과 체육관, 그리고 새로 깔린 인조잔디운동장의 콘트라스트가 유별나다. 33개 학급 1천6명의 학생과 2개반 51명의 유치원생들이 이춘만 교장 이하 66명의 교직원들과 함께 역사적 전통을 든든하게 등에 업고 밝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 2007년 전국 100대 교육과정 최우수학교로 선정되기도 했다. 방학 중인데도 운동장에선 육상부 아이들과 지도교사가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내덕로와 유하로가 만나는 곳에 지난 2006년 3월에 개교한 내덕중학교가 있다. 30학급 1천38(남 558)명의 학생들이 전창수 교장 이하 61명의 교직원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지난 2011년 8월에 전국에서 고성에 모인 500명 학생과 지도교사가 열전을 벌인 전국4-H경진대회에서 김우성·정윤혜 학생과 김영로 선생님이 자원봉사활동성과발표 분야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짧은 연륜이지만 봉사를 통한 인성교육에도 열심인 모양이다. 행정구역명 때문에 학교명을 내덕으로 했겠지만 사실 이곳은 외덕마을이었고, 내덕마을은 '해평원(海平原)'이란 들판 건너 내삼천과 조만강 가에 있었다. 강둑(덕)에 둘러싸인 해평원 양쪽에서 농사를 짓던 마을들로 시내 가까운 쪽을 내덕, 먼 쪽을 외덕이라 불렀다. 그래서 내덕중학교 아래엔 외덕마을회관이 있고, 뜰 건너 먼 쪽엔 내덕마을회관이 있다.
내덕마을회관에서 금관대로에 나서 새로 생긴 신항만배후철도의 고가 밑을 지나고 장유자동차운전학원을 지나면 조만강을 건너는 정천교에 이른다. 장유의 서쪽 경계다. 김해~장유~창원을 오가는 차량들의 소음이 굉장한데도 다리 아래엔 청둥오리 십 수마리가 별로 맑지도 않은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정천나루가 있었다는 다리 위에서, 건너편의 칠산이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던 시절을 그려보는 나도 저 오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발길을 되돌려 내덕중교차로 조금 아래에 있는 유하마을로 들어선다. 공장이 가득 들어차 마을이라긴 좀 그렇게 되었지만, 장유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인 유등야현(柳等也縣)이 있었던 동네다. 원래 김해시내에서 장유로 들어오던 입구였고, 그렇기에 장유면이 생기기 전에 있었던 유하면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마을회관에서 조금 더 오르면 자그마한 멍멍이가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키는 공장 위쪽으로 운치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소나무 왼쪽 감나무 밭 속에 한 때 가야왕릉 또는 장군총으로 전해졌던 유하리고분의 높은 마운드가 어른거린다. 지난 1994년 동의대박물관의 발굴조사로 연도와 문이 있는 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의 구조가 밝혀졌고, 철도 1점에 대부장경호와 고배의 파편, 그리고 9명 분의 인골이 수습되었다. 이미 1970·1974년의 도굴 사실이 알려진 뒤라 이렇다 할 유물은 없었지만, 7세기 후반 축조의 신라무덤에서 2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9명 모두가 여성으로 확인되었고, 입구를 열고 닫으면서 최소한 3차례 이상의 추가장이 이뤄진 것도 확인되었다. 건너편에 있는 조개무지의 유하패총과 농소패총의 존재를 생각하면 지금 고분 아래에 펼쳐져 있는 뜰은 축조 당시엔 옛 김해만의 파도가 출렁거리는 바다였을 것이다. 김해지방의 통치를 위해 신라에서 파견된 장군이나 지방관의 가족들, 또는 여성장관이 경주를 그리워하며 묻혔던 건지도 모르겠다.
맞은편으로는 들판을 향해 돌출한 나트막한 언덕의 하손마을에 하손패총이 있다. 지난 1979년에 도기념물 45호로 지정된 하손패총은 남해고속도로 건너에 있는 양동고분군(사적 454호)과 그 너머 가곡마을 뒷산 정상에 있는 양동산성(도기념물 91호)과 세트를 이루는 가야 항구마을의 유적이다. <김해지리지>가 전하는 정상부의 유하토성이 항구마을의 중심이었을 것이고, 이들이 묻히던 무덤이 양동고분군이었으며 전시에 들어가 농성하던 곳이 양동산성으로 생각되고 있다.
들판 쪽으로 가장 돌출한 남동쪽 비탈을 오르기 시작하면 이미 발밑은 온통 조개껍질이다. 굴 껍질이 주를 이루는 사이사이엔 온갖 종류의 가야토기들이 널려 있다. 유적안내판이 무색하게 경작을 하려는지 엊그제 새로 깎아낸 듯한 단층에서 천오백년 전 가야상의 비밀을 전해줄 소중한 이야기 자료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사진 몇 장을 찍었지만 발굴조사도 시급하고 유적보호는 더욱 시급하다. 양동산성·양동고분군과 함께 해상왕국 가야의 모습을 풀세트로 복원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귀중한 자료들이지만 손과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김해지리지>는 금은보화가 도굴됐고 고려장터나 부자가 많았던 장자등(長者嶝)으로 불렸던 것과 많은 버들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후손이 번창할 명당이라 하손(下孫)이라 했음을 전하고 있다. 삼계 화정도서관으로 이전한 유하출신 독립지사 김종훤(1893~1948) 선생의 기적비(1968년)가 있었다. 선생은 장유에 '신문의숙'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다 파고다공원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귀향해 김승태 지사 등과 함께 1919년 4월 12일 장유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징역 2년에 손발톱이 뽑히는 고문과 38세때 실명으로 긴 어둠의 세월을 보냈다. 1963년에 건국공로포장이 수여됐다. 하손마을 뒤편엔 바닷물이 밀려들던 '뒷 바당'(뜰?)의 후포(後浦)가 있었는데, 후포마을 입구 오른쪽 언덕에 장유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지사 최현호(崔鉉浩) 선생의 기적비(1978년)가 있다.
유하천 건너 남해고속도로 냉정분기점 밑을 지나면 진례면과 경계인 냉정마을이다. 고속도로 옆 서부로의 확장으로 어수선하고 몇 가구 남진 않았지만, 남해고속도로의 서부선과 북부선이 갈라지며 서부 경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란 점은 옛날과 다름 없다. 장유·진례·주촌 3면의 경계로 김해에서 서부로 나가는 국도 변엔 역원시설의 냉천원(冷泉院)도 있었다. 냉천과 냉정(冷井)은 '찬물 등(嶝)에 있는 찬물 샘'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고개 '등(嶝)'이니, '찬 물이 샘솟는 고개'로 지금 진례면의 표지판이 서 있는 언덕이다. 경계표지석 앞에서 왼쪽 비탈길을 조금 오르면 2502전투경찰대가 있다. 20년까지만 해도 부대에서 우물로 쓰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지만, 이제 가 보니 우물의 흔적은 사라지고, 부대의 용수탱크와 목욕탕이 세워져 있다. '냉정 찾기'로 장유순례의 피날레를 장식하려 했던 야망(?)이 물거품이 되었다. 물이 매우 차갑다는 안내병사의 위로같은 증언 하나만을 달랑 들고 돌아선다.
주촌면에게는 면목없는 시작이 되었다. 필자의 무계획 때문에 글머리부터 주촌순례를 시작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꼬리에 달고, 내동에서 주촌으로 가는 선지고개를 넘는다. 이제 서부로란 이름이 붙여져 확장공사가 한창인 이 도로는 지난 1988년 8월에 면소재지를 지나 양동마을까지 편도 1차선으로 개통된 길이다. 선지고개를 넘자 바로 나오는 동네가 당연하게도 선지마을이다. 신선 선(仙)에 연못 지(池)라 쓰고, 원지리 화살표의 도로표지판을 보고 오른 쪽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선지를 기준으로 동쪽 내동 쪽이 동선(東仙), 바깥 도로 쪽이 서선(西仙), 안쪽이 내선마을로 나뉘어 불렸었다.
동선마을 버스정류장 옆이나 조금 앞에 있는 선지사를 가리키는 고동색 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들어가면 선지사가 있는데, 도문화재자료 330호로 지정된 아미타여래좌상(1605년)과 500나한상으로도 유명하지만, 선지마을의 이름이 조사를 통해 확인된 곳이기도 하다. 지난 1999년 6월에 필자가 책임을 맡고 있는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의 수습조사에서 '선지사(선지사(仙地寺)'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확인되었고, 조사를 의뢰했던 원천 주지스님은 덕천사에서 선지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연못 지(池)와 땅 지(地)의 차이는 있지만 명문기와의 연대인 고려시대는 물론 통일신라까지 올라갈 수 있는 절터에서 이 땅의 이름이 확인되었음은 중요하다. 절로 들어서다 마주친 주지스님이 오랜만인데도 알아보고 반가이 맞아 주신다. 인생만사 희로애락의 표정을 담고 있는 오백나한상 중에는 예수를 빼 닮은 나한도 있어 KBS스펀지에 방영되기도 했단다.
선지에서 맞은편을 바라보면 물 위에 3개의 봉우리가 떠 있는데, 오른쪽 2개의 봉우리가 주촌의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주지봉(住持峯) 또는 주주봉(酒主峯)이다. <김해지리지(1991)>는 주주봉 아래 있는 마을이라 주촌이라 했다 하고, 주주봉(250m)의 높이가 똑 같은 '두 주봉'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만, 이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과 <여지도서(1765년)>는 번성하던 포구인 덕포(德浦)가 있었고, 덕포진교(德浦津橋) 밑을 지나 주촌지(酒村池)에 배가 정박했다는 기술에서 배 주(舟)의 주촌이었을 수도 있겠고, 나루의 왁자지껄한 주막(酒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낭만적 생각도 있다.
주촌이란 이름이 제일 처음 보이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는 김해도호부 서쪽의 주촌제(酒村堤)가 86결의 넓은 뜰에 물을 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엔 이미 바다가 아니라 앞쪽 조만강을 거슬러 오르는 강나루마을이었던 모양이다. 벼 300말 생산의 땅이 1결(結)이었으니, 좋은 땅이라면 25만여 평, 나쁜 땅이라면 102만7천여 평이나 되는 너른 들이 있고, 짐을 가득 실은 배가 오르내리며, 장사치와 여행자들이 붐비던 강나루마을에 노을이 진다. "술 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노을"이란 시가 저절로 떠오르는 '술 마을' 주촌(酒村)의 마을이름이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