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에 발굴조사를 마친 망덕리고분군. 모두 560기의 유구에서 오리모양토기와 뿔잔, 벽옥제석장 등 3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지만 황급한 발굴조사 끝에 흔적마저 완전히 지워졌다.
지난번에 걸음을 멈추었던 천곡리 이팝나무에서 오늘의 발걸음을 시작한다. 뒷산에 샘이 많아 샘 천(泉), 골 곡(谷)의 천곡리가 되었는데 우리말로는 '새미실'이다. 뒷산의 천곡산성은 십 여 년 전에 이미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했다. 이팝나무 뒤로 119m 꼭대기까지 올라보았지만 남은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시와 면의 관내도나 관광안내도의 표시보다 남쪽에 있는 모양이다. 정확한 위치파악과 안내를 위해서라도 정밀한 학술조사가 필요하다. 빈손으로 산비탈을 내려오며 산 서남의 서쪽에 180m 정도 활모양의 토축과 동쪽 계곡에 무너진 성벽의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는 <김해지리지(1991)>의 기록을 남겨둔다.

▲ 용덕마을 표지석. 용이 바다쪽으로 달리는 형상이라 '용산'이라 한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위)/ <김해지리지>가 전하는 덕교가 있었던 주촌교. 주촌면의 자료에는 덕교 돌다리 기둥과 난간들이 물속에 잠겨 있다고 한다.(아래)
2008년부터 천곡산성에 고압송전탑 설치를 추진하는 한전과 다투고 있는 천곡마을회관을 나와 조만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동서대로 용덕교 밑을 지나면 길 왼편에 용덕마을의 표지석이 서있다. 용덕은 용산과 덕교를 한자씩 따 부친 이름이다. 건너편 선지마을 쪽에서 '청우앞들'과 조만강 건너로 바라보면 한 마리의 용이 바다, 지금의 김해평야 쪽으로 달리는 모습 같다 해서 용산이라 했고, 조금 아래쪽 남해고속도로 주촌교 언저리에 있던 '떳다리'에서 덕교란 이름이 붙었단다. 마을 끄트머리의 강가에는 노거수 한 그루가 외롭지만 당당하다. 표지판이 없어 보호수 지정은 안 된 것 같지만 이삼백년은 족히 되어 보인다. 물가이고 굵은 줄기가 뒤틀려 있는 품이 왕버들이 아닐까 한다.
 
㈜크라운볼펜(2003.4) 밑을 돌아서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밭을 일구고 있다. 천곡패총으로 알려진 부근이라 말을 건넸더니, "조개껍질이 끝도 없이 나와요. 옛날엔 여기가 바다였다는데. 매년 검사하는 사람들이 와요"란다. '검사'란 아마도 문화재조사자들을 가리키는 모양인데 굴·피조개·전복 껍데기 등이 토기편들과 뒤섞여 있다. 가야요양병원(2009.9, 원장 신승건) 앞을 지나 바튼 산자락에 일렬종대로 늘어선 집 앞을 지나는데 도로 폭이 너무 좁아 잘못하면 논으로 굴러 떨어질 지경이다. 서부로 1430번길의 지방도란다. 논을 가로질러 굴다리로 남해고속도로 밑을 지난다. 좁은 굴다리의 어둠에서 놓여나자 왼쪽으로 남해고속도로 주촌교가 보인다. 이 근처에 <김해지리지>가 전하는 덕교(덕진교)가 있었던 모양이다. 덕진교의 나루 진(津)과 '떳다리'란 이름을 보면 물에 뜬 부교(浮橋)의 선착장 같기도 하지만 광복 후까지 시내 흥동 쪽에서 건너오는 돌다리가 있었단다. 길이 3.6m에 높이 30㎝ 되는 앉은뱅이 돌다리는 김해에서 서부로 나가는 자여도(自如道)란 조선시대의 국도였다. 주촌면의 자료는 지금도 돌다리 기둥과 난간들이 물속에 잠겨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조만강을 따라 내려가면 빨강 노랑 초록의 천을 두른 당산목의 팽나무와 푸조나무가 쌍을 이룬 정자가 나타나는데 농소마을의 시작이다. 동서대로 농소1교 밑을 지나 공장들 끝에 본 마을이 있다. 농사짓는 곳이라 농소라 했다는데 부자 세력가의 농장을 소작하던 이들의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왜성이 자리했던 언덕엔 나무도 풀도 없는 황토밭이 단을 이루고 있다. 황토색 언덕 위에 빨간 벽돌과 흰색 윤곽선, 그리고 은빛 첨탑이 빛나는 농소교회(담임목사 임종혁)가 파란 하늘에 선명하다. 출타 중인 목사님 대신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열성으로 교회를 지키고 있다. 한국동란 중인 1952년 3월에 창립해 마침 환갑을 맞았다는 아름다운 교회는 영화에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 농소교회. 1952년 3월에 창립돼 올해로 환갑을 맞이한 이 교회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광이다.
마을회관과 새마을구판장을 지나니 마을 끝에 모스그린 유리창의 인텔리젠트빌딩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김해의생명센터란 이름이 붙어 있다. 농소의 농장에서 의생명산업단지로의 변천을 선언하는 커다란 깃발처럼 보인다. 센터 앞에는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팽나무가 잔가지 하나 없이 죽은 듯이 서 있고, 도로 건너엔 수령 300년의 푸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나무발가락(?)을 보호한답시고 노란 철판을 덧씌운 게 우스꽝스럽다. 우회전 차량에 자주 밟혀 그랬겠지만 웃을 기분은 못되었다. 나무 뒤 언덕에선 밭 가장자리에 심어진 몇 그루의 매화가 진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달콤한 향을 따라 코를 들이 미는데 꿀벌들이 윙윙거린다. 예전 같으면 기겁을 했을 테지만 멸종돼 간다기에 오히려 반갑고 귀엽다.
 
언덕을 오르는데 제법 고급스런 청자·백자·분청사기·청화백자의 파편들이 눈에 띈다. 임진왜란 때 왜장 나베시마(鍋島直茂)가 가락의 죽도왜성과 함께 성을 쌓은 곳이라 전해진다. 덕진교성(德津橋城)·농소왜성(農所倭城)·신답왜성(新畓倭城) 등으로 불렸다는데, 왜란 후 1595년(선조28)에 소각 철거되었고 오랜 경작으로 왜성의 구획분할과 약간의 토축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아래에 펼쳐지던 황금들판은 이미 사라지고 모나게 구획된 농소·망덕의 산단조성이 마무리작업에 한창이다. 언덕아래에서 발견됐던 농소패총과 언덕 위에서 발견된 가야와 왜성 유적을 배경으로 바닷물이 출렁거리던 김해만과 김해의 해상활동을 그려보는 나는 분명히 시대착오인 모양이다.
 
▲ 천곡리패총 부근. 아직도 굴·피조개·전복 껍데기 등 패총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미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1964년 9월 농소패총에 대한 부산대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는 마제석기·골각기·빗살무늬토기 같은 신석기시대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1969년 9월 폭우로 노출된 토광목관묘에서는 중국식청동거울·청동칼자루장식과 철검·창·토기가 출토되었다. 가락국이 세워지던 1세기경의 유적이다. 2000년과 2001년의 발굴조사에서는 정상부에서 가야시대 제사의 흔적과 왜성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다만 국토지리원의 지도엔 동서대로를 건넌 조만강 쪽 언덕에 농소왜성이 표기되어 있다. 단순한 오류인지 동서대로의 개통으로 양쪽으로 나뉘게 된 것인지에 대한 학술조사가 필요하다.
 
신답마을 쪽 비탈엔 몇 백 년은 된 것 같은 소나무 한 그루가 허리를 구부려 이름도 없는 무덤 하나를 지키고 있다. 안에 들어서 보니 이렇게 좋은 파라솔이 없을 것 같다. 가지에 비료 봉투가 걸쳐있고 군데군데 누렇게 변한 솔잎이 걱정스럽지만 아직은 건강한 모양이다. 보호수의 지정과 관리가 필요하다. 언덕을 내려와 북쪽으로 공장 사이에서 신답경로회관을 지난다. 조만강에 둑을 만들고 논을 새로 간척한 마을이라 신답이라 했고, 둑을 바라본다고 망덕이라 했단다. 망덕마을구판장을 지나 마을인지 공장단지인지를 빠져나오니 너른 들판, 아니 공장부지 너머로 장유의 하손마을이 보인다. 바다가 들판이 되고 들판이 다시 공장단지로 되는 주촌, 아니 김해시의 일반적인 변천과정이 오늘도 되풀이되고 있다.
 
내삼천 쪽의 서부로 1430번길을 버리고 소망길을 따라 남해고속도로 밑 굴다리를 지난다. <김해뉴스>를 찍는 부산일보인쇄소 뒤로 남쪽 비탈 전체를 깎아내린 산이 온통 희뿌옇다. 얼마 전에 발굴조사를 마친 망덕리고분군의 참담한 뒷모습이다. 총 560기의 유구에서 출토된 3천여점의 유물 중엔 보물로 지정되기에 충분한 독특한 형태의 오리모양토기와 뿔잔, 일본의 수장급고분에서 출토되는 벽옥제석장(碧玉製石杖, 지팡이나 창 끝막이 장식)도 있었다. 청동기시대에서 가야시대를 거쳐 고려·조선시대까지 2천년 이상 무덤 변천의 역사, 아니 김해 변천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고분군은 황급한 발굴조사 끝에 흔적마저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컴퓨터의 삭제키를 누른다고 해도 이토록 깨끗이 지워질 수 있을까? 들판 맞은편의 양동고분군과 함께 가야사를 웅변해 주는 유적을 이토록 말끔히 지워버릴 수 있는 우리의 용기(?)가 무섭다. 역동적인 건설현장을 올려다 보는 나는 닭살 돋는 공포를 느낀다. 아래쪽 남해고속도로 확장구간에선 여기 묻혔던 가야인의 마을도 발견되었다. 집과 창고 터, 제사유적과 소 아래턱뼈, 쐐기모양의 정교한 나무못도 처음 출토되었지만 역시 고속도로로 사라질 운명이다. 고분군은 동서문물연구원(2010.10~2011.5)이 마을유적은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2010년 9월)이 각각 발굴조사했다.
 
▲ 주촌초등학교 앞에 있는 내삼못. '경상도속찬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삼백천지가 있던 곳이다.
서부로에 나서 동쪽으로 주촌초등학교를 향해 간다. 초등학교 앞엔 다음지도가 '학교앞소류지'로 표기한 내삼못(內三池)이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동쪽의 선지(주촌지)와 함께 기록된 삼백천지(三百川池)가 있던 곳이다. <김해지리지>는 인조반정으로 성공했다가 아들의 반역으로 처형되었던 김자점(金自點)과 연계된 설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 있다. 원래는 김자점의 집터였는데 역적으로 처형되자 파내어 못이 되었단다. 어떤 도사가 집에 와 나무기러기를 주면서 날개가 나면 왕이 될 수 있다는 참언을 했고 날개가 돋기 시작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기러기에 날개가 돋을 리도 없고 김자겸이 김해에 살았던 적도 없다. 다만 손자며느리인 효명옹주가 김해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기록이 있다. <인조실록> 23년(1645) 10월 29일에는 둔전의 불법소유를 지적하며 주인 없는 농토를 경작시켜 조세를 모두 빼앗던 효명옹주의 전장이 김해에 있음을 경상도암행어사 임선백(任善伯)이 보고하고 있다. 옹주의 농장과 불법착취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과 하소연이 김자점의 역적행위와 얽혀 만들어진 얘기인 모양이다. 당시 삼백천지는 86결(2만6천~102만7천여평)이나 되는 논에 물을 대는 아주 큰 저수지였다. 못 한가운데의 섬과 나무는 곧잘 동네 사진가들의 모델이 되기도 하지만, 물가를  단장한 목재데크와 예쁜 주촌어린이집 앞 잔디밭 위에 서 있는 알록달록한 어린이 인형들이 이런 사연을 알 리가 없다.
 
매년 10월이면 면민체육대회가 열리는 주촌초등학교의 인조잔디에 새로 칠한 교사와 체육관이 말끔하다. 1931년 9월에 주촌보통학교로 개교해 80년이 넘은 학교지만, 50명(남29)의 단촐한 학생들이 류인주 교장 이하 18명의 교직원들과 공부하는 초미니학교다. 올해 입학식에선 1학년 5명과 유치원생 8명이 새 가족이 되었단다. 인구과소화 현상이 심각한 주촌의 오늘이다. 서부로 1431번길을 따라 내삼교(2007.2)를 건너고 마을회관을 지나 내삼공업단지의 북쪽 끝에 들어선다. 다리 앞에 있는 기업안내도의 250여개의 공장들이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몇 조각의 논과 저수지를 빽빽하게 둘러싼 풍경이 엽기스럽다. <김해읍지(1929)>와 <김해지리지(1991)>는 내삼천 상류에 암벽 사이로 30m 높이의 폭포수가 반석에 떨어지는 내삼폭포가 장관이라 했지만 지금은 2단의 내삼저수지가 있을 뿐이다. 원당공단을 지나는데 내삼농공단지 뒷산에 남은 2002년 8월 10일 폭우피해의 상처가 보인다. 478㎜의 집중호우가 4일 동안 쏟아지면서 산의 동쪽 사면이 무너져 내렸다. 공장 10여 개가 매몰되고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였다. 지난 2009년 6월 지리한 소송 끝에 천재로 결론이 난 모양이지만 공장단지를 만든 건 자연이 아니고 우리들이다.
 
▲ 양동산성. 고대 산성으로서 조선시대 옹성 같은 구조가 최초로 발견된 유적이다.
산꼭대기에는 가야시대의 양동산성(도기념물91호)이 있다. 둘레 860m 높이 2.5m의 석축 성으로 가곡산성 또는 내삼산성으로도 불린다. 동쪽 시내의 분산성, 남쪽의 주촌과 칠산, 김해평야와 낙동강하구의 남해바다까지 훤히 내려다 보여 옛 김해만과 육로를 지키기에 좋은 자리였다. 2008·2010·2011년의 발굴조사에서 성벽을 원형 돌출되게 쌓은 북·남·동의 문지가 발견됐다. 동문지에선 조선시대의 옹성 같은 구조가 고대의 산성으로선 최초로 발견됐다. 농공단지 뒷 고개를 넘어 서부로 1295번길을 따라 양동마을회관과 양동저수지를 지나 내려오면 '노래실'의 가곡마을회관에서 400년 된 팽나무가 마중 나온다. 따뜻했던 마을에도 공장단지화는 여지없이 진행되고 있는데, 공장건설을 계기로 마을 뒷산에선 국가사적 454호의 양동고분군이 발굴되었다. B.C 2~A.D 5세기에 조성된 550여기의 고분에서 출토된 화려한 옥구슬장식, 덩이쇠, 철제무기와 갑옷, 중국제 청동솥과 왜계청동기 등 5천여점은 해상왕국과 철의 왕국의 가야를 웅변해주는 가야고분의 전시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주관으로 4월 6~7일에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열리는 가야사국제학술회의 '김해 양동고분군과 고대 동아시아'를 찾아 주시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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