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3월 개관한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골프장 건설로 허물어져 가는 '무릉도원'의 고령마을서 내려와 화포천 건너 진영의 고모삼거리로 나갔다가 남쪽으로 서부로를 따라 다시 진례로 돌아온다. 백산도예원(문광수) 앞 삼거리에서 도로표지판의 화살표와는 반대로 오른편의 면사무소 쪽으로 들어서서 김해가 자랑하는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관장 최정은)에 이른다. 왼쪽을 가리켰던 표지판의 화살표는 대형버스 등을 도로가 넓은 쪽으로 안내하느라 그렇게 된 모양이다. '클레이'는 진흙으로 도자를 뜻하고, '아크'는 건축의 아키텍처를 줄인 말로, 전국에서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별로 예가 없다는 건축도자미술관이다.

▲ 분청도자관.
2006년 3월에 개관한 놀이동산입구 같은 정문을 들어서면 알록달록한 타일로 뒤덮인 원통의 전시관이 눈에 가득하고 철쭉이 만발한 산책공원 너머로 역시 알록달록한 타일의 오벨리스크 같은 상징탑이 솟아 있다. 안쪽에는 특별전 때 초청되는 작가들이 머물며 작업하는 연수관과 관람객의 체험학습관이 있다. 지난 3월 두 번째 전시관으로 오픈한 큐빅하우스는 3개의 전시실과 어린이와 가족의 문화예술교육을 위한 스튜디오와 도서관을 갖추었다. 개관 후 6년 동안 모두 11회의 기획전과 36회의 특별전이 개최되었는데, 화장실 변기를 전시하고(꿈꾸는 화장실·2006), 낙랑고분의 벽돌로 쌓은 집을 만들고(건축도자-old전·2008), 버려진 근대 공장벽돌로 작업하는(벽돌·한국 근대를 열다·2010) 등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며 건축과 도자의 관계에 눈뜨게 하고 도자미술관의 발전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다만 분청사기의 고장인 김해에 도자미술관을 세우면서 이 고장의 도공과 문화인들 모두가 배제되었던 것이나, 신상호 초대관장의 '원맨쇼적 경영'과 관장 작품의 도배와 전시 같은 '계산머리'가 세인의 입은 물론 언론과 시의회의 도마에까지 오르내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김해시의 다른 문화기관에 비해 적지 않은 인원과 예산을 가진 미술관으로서 이제는 관람객 수나 실제 건축도자 산업의 개척과 발전으로 증명해 보여야 할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 진례 하촌마을 입구의 '반효자와 조효녀 정려비'.
클레이아크와 이웃해 2009년 5월에 개관한 김해분청도자관은 매년 분청도자기축제의 센터가 되고 있다. 축제 때에 불을 지피는 전통가마의 등요(登窯)가 전시관 왼쪽에 계단처럼 앉혀져 있고, 김해분청의 역사를 보여주는 1층 전시실과 여러 공방의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2층 판매장이 있다. 2층 판매장 앞에는 봄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는 테라스가 있다. 17년 전통의 분청도자기축제는 물론, 매년 4회 정도의 기획전과 전국 규모의 공모전, 그리고 도자캠프와 같은 체험행사 등이 진행되고 있다. 다만 김해도예협회 여러 분들의 공동노력으로 운영되는 관계로 학교 학예회 같은 원초적인 기획과 특별전으로 때워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돌아 나오는데 정문 한 쪽에 전시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파라솔 하나가 펴져 있다. 야외전시나 체험학습이라도 할 모양이지만 비싼 건물의 예쁜 전시관을 한 번에 망쳐 버린 느낌이다. 전문 학예사와 교육사의 부재가 너무 아픈 현실로 다가온다.
 
진례로에 나가 수민도예(강수석)와 새얼도예공방(유영창)을 끼고 돌아, 백설공주의 성처럼 생긴 숲속둥지어린이집을 지나고, 청곡도예(조규진) 앞에서 시례교를 건넌다. 시례교 끝의 마을 표지석에서 혼법천을 따라 오르다 보면 개울 건너편에 가야토기의 복원에 성공하고 제작 체험도 해 주는 두산도예(강효진)가 보인다. <김해지리지>는 마을이름의 '시례'가 시루골의 '시루'에서 비롯되었다 전하지만 어디가 그렇게 생겼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시례 중심마을의 이름 상촌이 또 다른 단서가 된다. 상촌(上村)은 상홀(上忽)과 같은 이름인데, <삼국사기>지리지는 상홀은 다시 차성(車城)으로 표기하고 있다. 차(車)는 '수레'이고, 위 상(上)의 우리말은 '수리'로서 윗자리를 나타낸다. 윗마을의 수리나 수레가 시례로 되었거나 지난번 진례의 어원처럼 '시내'가 '시례'로 되었다는 설명도 좋을 것 같다.
 
▲ 진영 시례리 노티재. 진영 우동리를 거쳐 창원 자여역으로 통하던 고갯길이다.
혼법천 옆 진례로311번길을 따라 오르면 하촌마을 입구 솔밭모서리에 2002년 3월에 상촌에서 이전해 온 반효자와 조효녀의 정려비가 있다. 효자 반석철(潘碩澈)은 조선 세조 때 장흥고(長興庫) 주부를 지낸 사람으로 6년 시묘에 호랑이가 함께 했고, 시묘의 정성으로 그의 논에는 가뭄에도 비가 왔을 정도여서 1470년(성종1)에 정려가 하사되었다. 오른쪽 정려의 주인공인 효녀 조씨는 반효자의 외손녀로 집안이 가난해 길쌈으로 고기와 술을 사 부모를 섬겼고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를 소생케 했던 창녕조씨의 효녀였다.
 
소나무 숲 위의 하촌마을을 지나 작은 들 건너에 상촌마을 회관과 표지석이 있다. 회관 왼쪽으로 가면 시례리에서 가장 늦게 생긴 '새터'의 신기마을이 있고, 곧장 산 쪽으로 오르면 진영 우동리를 거쳐 창원 자여역으로 통하던 고갯길의 노티재가 열린다. 좀 전에 지나 온 하촌마을 서남쪽의 원등(院嶝)이란 지명은 이 노티재를 넘기 전에 머물렀던 노현원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노티재(노현)는 임진왜란 때의 전적지로서 1592년 10월 24일에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이 키무라(木村重玆)·하세가와(長谷川秀一)·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의 왜장이 이끄는 대군을 맞아 전투를 벌이다 함안 쪽으로 후퇴했던 고개였다.
 
상촌마을에서 북쪽으로 진례로371번길을 따라 청천리로 넘어간다. 상'곤법'회관을 지나고 광진요(김광수)와 청수헌도예를 거치면 하곤법회관에 이른다. <경상도지리지, 1425년>에 고법야촌(古法也村)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면 '고법'이 '곤법'으로 변한 모양이다.
 
▲ 옛 김해터널. 남해고속도로 새김해터널에 밀려 한산한 국도 터널 신세가 됐다.
정원하이드파크(2005.12, 114세대)와 백조한마음빌라를 지나 서부로에 나선다. 오른쪽으로 가면 2011년 경남도자기최고장인으로 선정되고, 며칠 전 제8회 김해시공예품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했던 길천도예원(이한길)이지만(김해뉴스 2일자 보도), 우리는 발길을 왼쪽으로 돌려 52군수지원단과 한마음군인아파트 앞을 지나 다곡삼거리에서 김해터널 쪽으로 오른다.
 
어수선하게 늘어선 공장 몇을 지나면 청천리의 중심마을 '찻골'이란 다곡(茶谷)마을이다. 서~북쪽의 노티재·응봉산·태종산에서 화포천으로 흘러내리는 열 두 골짜기의 냇물이 아주 맑아 청천(晴川)이라 했고, 물이 좋고 차가 좋아 다곡이라 했다. 얼마 전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박연차 씨 소유 '금호회관'의 닫힌 정문을 지나 다곡마을회관에서 김해터널 쪽으로 다시 서부로에 나서면 새로 지어 말끔해진 낙오정(樂吾亭)이 있다. 낙오정은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사수하다 순국했던 낙오(樂吾) 류식(柳湜) 선생을 추모하고 제사하는 제실이다. 임진왜란 사상 최초의 의병장이기도 했던 선생이 결사항전을 위해 지팡이를 꽂아 우물을 솟아오르게 했다는 자리는 지금도 시내 동상시장에 유공정(柳公井)이란 이름으로 비와 함께 남아 있다.
 
고속도로와 나란히 서부로를 달려 올라가면 진영의 하계리로 넘어가는 김해터널이 반원형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다. 원래는 남해고속도로의 터널이었지만 선형 개선사업 후 새김해터널에 자리를 내주고 버려지다시피 했다. 수많은 차량이 광속으로 달려가는 고속도로와는 대조적으로 차량이 거의 없어 한적하고 기묘한 분위기다. 편도 1차선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가자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다. 드디어 진례의 순례가 끝났다. 아니 새로운 진영의 순례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 임진왜란 의병장 류식 선생의 제실 낙오정.
전통시대 시내에서 진영으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우리가 걸었던 코스와 같다. 주촌고개를 나서 냉정고개를 넘고 진례의 노티재를 지나 창원(동읍)의 자여역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새로 부산~마산 간의 국도로 개설되면서 시내 북쪽의 삼계를 나와 마산으로 향하는 길이 몇 번의 확장과 정비를 거쳐 김해대로로 다시 태어나 가장 빈번하게 이용하는 길이 되었다. 최근에는 시내 남쪽의 동서대로를 통해 진영으로 들어오는 빠른 길도 생겼지만 좀 멀리 도는 느낌이다.
 
▲ 설창교. 진영읍의 경계로서 '삽다리'라 불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다. 김해터널을 나가 하계리부터 진영 순례를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시내에서 다시 출발하는 발걸음을 택하려 한다. 삼계사거리를 나서 망천고개와 명동정수장 고개를 지나고, 가구거리와 한림 딸기 홍보판이 있는 한림면의 경계로 들어선 뒤 한림민속박물관 언덕을 지나 소업삼거리에서 동서대로와 만나고, 빙그레삼거리 앞을 지나 설창교에서 화포천 건너 진영읍에 들어선다. 설창교(1994.12)의 원래 이름은 모래 사(砂)의 사교(砂橋)로서 '삽다리'라고도 불렸다 한다. 삽다리는 북쪽의 낙동강이 화포천을 따라 여기까지 밀려 올라왔던 지난날의 자연지형에서 비롯되었던 지명이다.
 
이내 말끔하고 도회적인 진영역이 나타난다. 2010년 12월의 경전선복선전철화로 읍내에서 옮겨왔고 KTX의 운행도 시작되어 평일 왕복 4회와 주말 왕복 6회의 열차가 정차하고 있다. '노무현역'의 개명이 주장되었을 정도로 봉하마을에서 가까운 김해시 유일의 철도 관문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전시회를 위해 오는 20일과 23일에는 서울 직통의 '봉하열차'가 운행될 계획이란다.
 
▲ 진영 설창마을 노거수 푸조나무.
설창고개를 내려가다 보면 설창마을 정류장 아래에 거대한 노거수 몇 그루가 줄지어 있다. <김해의 노거수·2008>에 따르면 200~300년 된 느티나무 2그루와 50~400년 된 6그루의 푸조나무로 소개되고 있다. 울창해진 나무그늘 속에 펜션 같은 설창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당산나무로 섬겨져 왔음이 짐작된다. <김해지리지>는 설창정자를 기록하면서 조선 현종 7년(1666)에 김해부사 김성(金城)이 인근 몇 개면에서 거두는 세금보관을 위해 지었던 창고에서 유래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당산목 언저리에 있었던 설창정자가 설창 터로 전해지고 있는데 정자는 마을회관으로 다시 지어진 모양이다.
 
설창마을 뒷산의 감나무 밭을 넘으면 동북쪽 끝자락에 효동(孝洞)마을이 있다. 이젠 진영역 뒷동네로 불러야 좋겠지만 좀 전에 진례의 시례마을에서 만났던 반효자의 무덤이 있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단다. 마을을 나서 노 전 대통령 생가와 클레이아크의 고동색 대형 안내판을 지나면 진례나들목·진영(구 국도)·창원·효동마을로 갈리는 설창사거리에 이른다. 진례나들목과 창원 사이에 난 옛 국도의 진영로를 택해 진영읍내로 들어선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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