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재 김해뉴스 독자
김혁재 김해뉴스 독자

네 개의 다리 위에 평평하고 네모난 나무판자가 놓여있는 무엇인가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의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것이 나무가 아닌 철로 만들어져 있었다면 의자가 아닌가? 의자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니, 본질은 무엇인가? 본질이란 그 사물이 그 사물이게끔 하는 성질이다. 다른 사물과의 공통성과는 대비되는 차이다. 그렇다면 의자의 본질은 "앉기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것이다. 의자의 본질은 오직 그 용도에 있다. 그렇다면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예술의 본질은 그 용도에 있는가?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에 따르면, 언어기호란 "다른 어떤 개념도 아닌 바로 그 개념"을 구분하는 것이다. 즉, 언어 행위란 차이를 인식하는 행위다. 의자를 의자이게끔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의 용도이고, 예술을 예술이게끔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용도에 있지 않다. 위 소쉬르의 이론을 바탕으로 우리는 또 다른 통찰이 가능하다. 우리는 어느 사물을 지칭하며 그것을 다른 모든 것과 대비시키는바, 우리가 "의자"를 지칭할 때, "의자가 아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딸려 나온다. 즉, 우리는 '의자'를 지칭하며 동시에 세계 전체를 지칭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계를 대립하는 두 개념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대립하는 두 개념의 중첩, 즉 모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에서 중립적인 시선으로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토끼인지 오리인지 구분이 모호한 어떤 그림을 가져온다. 토끼의 귀는 오리의 부리로, 오리의 부리는 토끼의 귀로 혼동할 여지가 있는 그림이다. 오늘 그 그림을 볼 때와 내일 그 그림을 볼 때,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림은 어떤 날은 오리 그림이고, 어떤 날은 토끼 그림인가? 그렇지 않다. 그림은 그대로 있는데 오직 그것을 보는 사람의 상(相)이 변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는 그러므로 그것을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해석하는 바와 같이 본다."
 
예술의 본질은 용도나 모양이 아니라 존재에 있다. 존재 자체가 본질인 것은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 세계다. 인간의 창조물은 대부분 어떤 용도를 지닌다. 인간이 창조하는 것 중 용도가 없는, 존재 자체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은 그들의 자식과 예술뿐이다. 인간은 그것을 관조하고 해석한다. 관조는 우리들의 이용을 벗어나는 것들에 이루어진다. 해석은 그것을 각자의 관점으로 지칭하고 이분하며, 모순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인간은 예술을 세계를 보듯이 본다. 용도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는 그 자체로 토끼-오리 그림이다. 예술의 본질은 존재 그 자체에 있다. 예술은 대립하는 두 개념의 중첩, 즉 모순을 담고 있다.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분리할지, 또 그 두 개념 중 무엇을 택하여 작품을 바라볼지는 하나도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작품을 단지 해석하는 바와 같이 본다. 예술의 용도와는 별개로, 예술의 존재 의의는 당신이 세상을 보는 방법과 타인이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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