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민기 문학평론가
차민기 문학평론가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수십 년째, 중고등 국어교과서에 실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일부이다. 소설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인 '배경'의 기능을 가장 잘 살렸다는 이유로 이 작품은 중·고교 국어 교과의 필수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정작 교육 현장에서 이 작품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만만찮은 일이다. 도심지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이 낭만적인 달밤의 분위기를 재현해 전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통 장날의 개념이 없어져 버린 요즘에 장돌뱅이의 서사는 작가가 의도한 만큼 그 애환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어렵다. 
 
이 작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충주집은 입술을 쫑긋 하고 술 붓는 솜씨도 거칠었으나 젊은애들한테는 그것이 약이 된다나 하고 그 자리는 조선달이 얼버무려 넘겼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애숭이 빨문 죄된다.'
 
채 스물도 안 된 '동이'가 주막집 여주인 '충주집'과 수작을 벌이다가 이를 질투한 '허생원'에게 뺨을 맞는 장면이다. 게다가 장터 꼬맹이들이 발정기에 들어선 수컷 나귀의 생식기를 가리키며 놀리는 장면이라든가, 그걸 나무라는 허생원을 두고 "왼손잡이가 사람친다"라며 허생원을 조롱하는 장터 꼬맹이들의 모습은 직업의 귀천이라든가,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 등이 어우러져 성장기 아이들의 고개를 연신 갸웃하게 한다. 더 나아가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간' 허생원이, 술집에 팔려가기 싫어 야반도주를 감행한 절박한 처지의 '성서방네 처녀'와 하룻밤 인연을 맺게 되는 장면에서는, 달밤의 낭만적 분위기는 고사하고 이 장면을 어떻게 얼버무려야 할지부터 고민이 된다. 아무리 미화해서 전달해도 요즘 아이들의 성 인식에 부합할 수 없는 까닭이다.
 
국어교과서는 말 그래도 한 나라의 말과 정신을 가르치는 교본이다. 이런 까닭에 교과서에 수록되는 작품들은 그 나라, 그 민족만의 고유한 정서가 들어 있어야 하고, 나아가 이것이 인류 보편의 정서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한국문학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들에 연이어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개별성과 보편성이 잘 어우러진 반증이다. 이러한 결과들은 단순히 빼어난 몇몇 작가들의 개인 역량으로 설명될 일이 아니다. 이들이 문화적 소양을 길렀던 1차적 독본이 국어교과서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문학의 미래를 보다 밝게 하기 위해선 이제까지의 교본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할 때이다. 책이 점점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에서 적어도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만이라도 다시 손을 보아야 한다. '문화강국'이라는 자긍심에 걸맞게, 수용자들을 고려한 보다 미래지향적인 교재 개편에 모두가 적극적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활용한 다양한 인접 콘텐츠 개발도 절실하다. 사회 각층에서 이를 위한 다양한 담론들이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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