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학삼 김해대학교 사회복지상담과
최학삼 김해대학교 사회복지상담과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관료나 지방관은 많이 있다. 우리 김해에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지방관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조선시대 말기 김해부사(요즘의 김해시장)로 재임한 정현석이다. 정현석은 고종 때 후릉참봉을 시작으로 조정 내에서도 많은 부서에서 일했고, 지방 10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업적이 무수히 많아 그가 일했던 거의 모든 고을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특히 김해부사 재임기간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정현석 김해부사는 오늘날 김해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봉황대를 구축하고 명명(命名)하였다. 그가 올라 본 구릉의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편 모양과 같다고 하여 봉황대로 명명했다고 한다. 또한 임호산의 흥부암을 류상필 부사(1820년 전후에 재임)에 이어 다시 중창하였다. 그 외에도 권탁을 기리는 김해 현충사 재건, 연자루 및 함허정 중수, 수로왕릉의 가락루 중수 및 정자각, 안향각 등을 보수하고 제기와 제복도 개량했다. 또한, 폐사된 호계사(虎溪寺) 터에 있던 파사석탑도 허왕후릉으로 이전하였으며 허왕후릉도 대대적으로 수리 및 정비하였으며 김해부(府) 동헌, 객사도 중수하였다.
 
정 부사는 재임 중 위대한 충절의 고장 김해를 다시 부각시키는 업적을 쌓기도 했다. 그 업적은 바로 임진왜란 당시 김해의 사충신(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을 기리는 사충단 건립이다. 또한 그는 사충단비각기(四忠壇碑閣記) 내용도 직접 썼으며, 사충단 향례에 필요한 규범인 금관충렬단절목도 제정하였다. 
 
정 부사는 진주 교방의 노래와 춤에 관한 내용을 다룬 「교방가요」라는 책을 전임 근무지였던 진주목사 시절부터 쓰기 시작하여 김해부사 재임 중(1872년 2월)에 완성하였다. 그는 서예능력 또한 뛰어나 임진왜란 때 송빈이 전사한 송공순절암에 각인된 송공순절암 각자도 그의 글씨이며, 진주 남강 의암(義巖)에 각인된 의암 각자도 그의 글씨다. 또한 그는 학문 장려를 위해 양사재(현재의 취정재)를 중건했다. 후에 동래무예학교 설립 및 원산학사 설립도 그의 학문 장려의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는 교육, 농잠(農蠶), 광산 채굴 등을 위한 인재의 등용과 그 장려책을 조정에 건의하였으며, 농업발전을 위해 권농전(勸農錢) 일천 냥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고종 8년(1871년)에 분산성을 재축성하였다. 산성 내에는 관청 창고와 망루도 건축했고 군량 지출비용인 향미(餉米)도 비축했으며, 조정에 장계를 올려 분산성에 별장(別將) 1명과 승군(僧軍)을 배치하게 하였다.
 
정 부사는 순영(감영)에서 조정에 장계를 올려 임기보다 1년 더 연임되기까지 했다. 또한 그는 김해부사 재임 중 돈녕부 도정(정3품)으로 승진되어 중앙 조정으로 진출하였다. 
 
위와 같이 정현석 김해부사는 김해부사로 재임 중 문화재 보호, 관청건물 관리, 학문적 능력발휘, 학문장려, 인재등용, 산업장려, 국방강화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탐관오리들처럼 개인의 부귀를 추구했거나 국가 및 지역과 백성을 위하는 진심이 없었다면 결코 이런 일들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정현석 김해부사야 말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관료 및 일반 사람들이 분명히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청백리의 표상일 것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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