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민기 국문학박사·문학평론가
차민기 국문학박사·문학평론가

커피 마니아로 익히 알려진 고종이 커피를 처음 맛 본 것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관에서였다고 하니, 우리나라 커피 역사의 시작은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로부터 100년.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커피 시장이 되었다. 특히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인 스타벅스는 대한민국에서도 최고의 브랜드가 되었다. 1999년 이화여대 앞에 1호점이 문을 연 이후 20여 년 동안, 매장은 총 1500여 개로 늘었고 매출은 2조 원에 이른다. 문득, 스타벅스의 마케팅 전략이 궁금해진다.
 
'스타벅스'라는 이름은, 멜 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일등항해사의 이름인 '스타벅'에서 따왔다. 영어 교사(제리 볼드윈), 역사 교사(지브 시글), 작가(고든 보커) 들로 구성된 스타벅스의 설립자들은, 갑판 위에서 늘 책을 놓지 않았던 항해사 '스타벅'에 주목했고 여기에 신화 속 요정 '사이렌'의 이미지를 보태어, 지금의 스타벅스를 만들었다. 스타벅스가 운용 중인, 스마트 기기를 활용하는 '사이렌 오더'라는 이름 또한 여기에서 따 온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리듯, 우리는 매장 안에서 우리를 부르는 벨 소리에 홀려 주문대로 달려가는 셈이다. 이렇듯 스타벅스의 역사 속에는 인문학 마케팅이 녹아 있다.
 
'인문학 마케팅'의 또 다른 본보기로는 스티브 잡스를 꼽을 수 있다. 잡스가 일상 곳곳에서 회자되는 것은, 그가 이루어 낸 단순한 기술의 진보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애플폰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기술의 차이로 인한 것은 아니다. 애플의 로고에 얽힌 스토리에서부터 아이팟, 아이폰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그 기술을 더 빛나게 한 것은 그것들에 녹아든 인문학적 사유 때문이다. 여기에 출생의 비화라든가, 청소년기의 방황, 그리고 실적 부진으로 경영에서 퇴출된 스티브 잡스의 이력들이 아이폰의 성공에 한몫을 보태었다. 아이폰에 대한 사용자들의 충성도가 높은 것도 어쩌면 이런 복합적 스토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때 '스토리텔링'이 온 나라를 뒤덮던 때가 있었다. 대학들뿐 아니라 지자체들도 저마다의 오랜 역사를 들추어 그것을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내려고 애를 썼던 때다. 돌이켜보면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어느 사이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졌다. 스토리를 만들어 퍼트리고, 그것이 일반 대중의 삶 속에 스며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까닭이다. 기술의 속도에만 맞춰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변화나 결과를 기대한 까닭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는 결과들은 그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은 금세 낡고, 새로운 기술은 또 새로운 기술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나날살이가 사뭇 많이 변한 듯하나 그 본성은 수천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술의 발달로 확장된 온-오프라인 공간을 넘나들며 즐겁게 교감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 모두는 이미 훌륭한 '스토리텔러'들이다. 앞으로도 기술은 빛의 속도로 진화해 갈 것이고, 인간은 그 진화된 기술을 누리기 위해 자기 안에 잠재된 다양한 본성을 일깨워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본성의 근본에는 사람과 사람끼리의 교감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인문학은 바로 그 교감에 대한 학문이다. 이것이 기술 시대에 인문학이 병행되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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