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선대에 무리를 이룬 적송들.
지난번에 숙제로 남겼던 대눌과 소눌 선생의 이야기로 오늘의 발걸음을 시작하려 한다. 지금 한림면의 금곡마을에 형제학자로 이름을 남겼던 두 분이 사셨다. 금곡리의 근본 되는 마을이라 '본금곡'이라고도 했다. 북은 낙동강, 동은 작약산, 서는 화포천에 막혀 남쪽의 좁은 길만이 겨우 트여 있을 뿐이다. 세상의 기(氣)가 다 모일 것 같은 마을에서 학문과 지조를 아울렀던 두 분이 나셨다. 대눌 노상익(盧相益 1849~1941)과 소눌 노상직(盧相稷 1855~1931) 선생이다. 호에 말 더듬을 눌(訥)이 있어, "말씀이 좀 어눌해서 그랬다"는 후손 조좌현 씨 같은 이해도 있는 모양이지만, "달변보다는 더듬는 게 낫다"며 말을 아끼고 실천은 중시하려 했던 다짐이 들어 있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말을 어눌하게 하며 실행에 민첩하고자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라고. 말과 표정을 꾸미는 교언영색(巧言令色) 보다 오히려 어눌함에 참을 인(忍)과 어질 인(仁)이 있다는 가르침 때문이다.
 
두 분에 대해서는 김해뉴스 2012년 12월 20ㆍ27일자에 꼼꼼한 취재와 상세한 소개가 있었다. 약간의 손만 보아 몇 줄을 옮기려 한다. 대눌 선생은 극재 노필연 공의 장자로 태어났다. 1882년(고종19) 34세 때부터 과거로 벼슬길에 나섰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63세의 고령에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에서 유민을 가르치고 인재를 키웠다. 전통의 향약(鄕約)에 기초한 민족공동체를 지향하고 백성의 이익을 대변했다. 74살에 마을로 돌아와 천산재(天山齋)를 짓고 두문불출하다 93살인 1941년 11월 12일에 돌아가 천산재 뒤 산비탈에 묻혔다. 9권의 문집, 압록강 도강록(渡江錄), 아픈 민족사의 통사절요(痛史節要) 등을 저술했다. 엄동의 압록강을 건너며, "예순 셋에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자니 / 변경의 눈보라가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듯 / 우리나라와 중국 모두가 임금이 없으니 / 방울진 눈물로 압록강도 목메어 흐르지 않는 듯"하다고 울었다. 나라 사랑의 지조와 절개가 뼈저리게 전해 온다.
 
▲ 제석궁 안곡리삼층석탑.
아우 소눌 선생은 5살에 효경, 10살에 대학과 중용, 11살에 논어와 맹자, 13살에 주역을 읽고, 11살에 형과 함께 김해부사로 부임한 성재 허전 공에게 수학을 시작한 후 21년 동안 문하를 떠나지 않았다. 향시와 한성시도 치렀으나 31살 때 부친과 사부의 상복을 입은 후엔 독서와 강학에만 전념했다. 산청·밀양·창녕·창원·김해 등지의 강학에서 키웠던 제자가 천명을 넘었고, 목판으로 방대한 성호문집과 강역고 등을 간행했으며, 향토사의 가락국사실고(駕洛國事實攷)·인명사전의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여성교육서의 여사수지(女士須知)·역사지리의 역대국계고(歷代國界攷) 등을 저술했다. 소눌문집책판으로 모아진 저술은 도유형문화재 제176호로 지정돼 밀양시립박물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목판의 고전간행에 대해 "책 가운데 천고의 마음을 전하노라(方冊中傳千古心) / 노년에 곱씹으니 맛이 더욱 깊어진다(老年咀嚼味增深) / 돌이켜보니 시대가 지나며 말이 사라진지 오래됨을 근심한다( 愁世降言湮久) / 날마다 책 새기는 걸로 나의 임무로 삼는다(日以 書作己任)" 라 했음을 보니,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게 했던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이 소중하게 전해온다.
 
또 선생은 1919년에 3·1만세운동의 주동에서 소외됐던 전국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의 '파리장서'에 서명해 제자 14명과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1년 1월 30일에 돌아가신 후 한참 세월이 지난 2003년 8월에 건국포장을 받았고, 2009년 6월 23일에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 안치되었다. 자기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가 횡행하는 마당에 "나라 어려운 시절에 무슨 벼슬이냐"며 학문에 몰두하고 인재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으로 실천했던 선생의 모습을 그리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밀양에는 선생이 강학하던 자암서당도 있고 저술의 목판도 있으며 학술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지만, 정작 고향인 김해엔 마을입구의 노거수들과 동구 밖에 혼자 남은 묘비밖에 없다.
 
지난번 숙제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두 분 형제학자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400살 노거수들과 소눌 선생의 묘비를 뒤로 하고 화포천까지 펼쳐진 싱싱한 뜰을 바라보며 금곡천을 건넌다. 길가의 외오서와 안쪽의 내오서 마을을 지나는데, 까마귀 오(烏)에 깃들 서(棲), 또는 나 오(吾)에 서쪽 서(西)를 쓴단다. 까마귀가 알을 품는 좋은 형세라고도 하고, 단종 폐위에 반대한 서강(西岡) 김계금(金係錦) 공이 벼슬을 버리고 여기 살면서 단종이 계신 서쪽의 영월만 바라보았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큰 부자가 살아 장자골로도 불렸다는 장재마을에서 '상꾼모롱이'라는 장재고개를 넘는다. 생림면 분절마을 조금 앞에서 경동교(2003.6)를 서쪽으로 건너고 다시 독점교로 사촌천을 건너 독점마을을 지난다. 일제강점기에 구리와 주석을 캐던 독점광산이 있었던 곳이다. 홀로 독(獨)에 토기나 철기를 만들던 점(店)이니 외딴 금속공방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길가에 늘어선 '고철·금속' 등의 간판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안하리의 '큰 밑천'이란 뜻인지 너른 '화주(化主)들'을 가로질러 어은교(1999.4) 건너 어은마을로 간다. 화포천 습지를 사이에 두고 한림정과 마주한 작은 마을이지만 독립운동가 배치문(裵致文) 의사가 난 곳이다. 물고기 어(魚)에 숨을 은(隱)이라 북쪽에 물고기가 숨은 형세니 자손이 많겠고, 마을 앞이 '어령(魚龍)들'이라 부자가 날 곳이라고도 했지만, 배고프고 고달픈 혁명가가 태어났다. 1890년 출생의 배 의사는 1906년에 김해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4월 8일에 목포의 만세운동을 주도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중국에 망명해 의열단으로서 비밀결사운동을 펼치다 1927년에 체포돼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1930년부터 호남평론에서 집필활동을 전개하다, 1941년 3월 10일에 출판보안법으로 투옥되었다. 53살 되던 1942년 5월 20일에 옥중 사망했다. 영남사람으론 보기 드물게 호남의 목포에서 사회주의노동운동을 전개했던 때문인지,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전남 목포 출신으로 기재돼 있다 한다. 1982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자 1983년 5월에 공적을 기리는 기적비가 한림면사무소에 세워졌다. 2000년 8월에 명동리 통일동산으로 옮겼다가 2007년 2월부터 삼계동의 화정공원에 자리하게 되었다. 매년 3월 1일 의사를 기리는 추모식과 3·1절기념식이 거행되고 있다. (김해뉴스 2012년 03월 6ㆍ13ㆍ20일자 참조).
 
오던 길을 되돌아 용덕천을 거슬러 오르면 산 너머에 장원마을이 있다. 용덕리 북쪽 끝에 위치한 이 마을의 이름은 세조 12년(1466)에 마을출신의 김극검이 문과중시에서 장원급제한 데서 유래한 것이란다. 마을입구에 서 있는 정자나무가 김해김씨 서강파 여천종친회관과 잘 어울려 맞은편의 공장단지와는 다른 세계처럼 보인다. 동쪽의 어용교(2001.4)로 용덕천을 건너 오항마을 입구에서 순대국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채우고 안명초등학교로 간다. 1940년 4월에 안하사설강습소로 시작해 1948년 3월에 개교하고 이듬해부터 여기에 자리했다. 지난 2월의 64회 졸업식까지 총 2천37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69명의 학생(남 38)과 10명의 유치원생이 29대 서점선 교장 이하 22명 교직원들의 사랑으로 자라나고 있다. 가족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학교 홈페이지에 칭찬 릴레이가 꾸준하다.
 
▲ 숲골로 불린 안하천.
학교 남동쪽 모퉁이엔 높다란 메타세콰이어와 두 그루의 커다란 버드나무가 치렁치렁하고 윤기 나는 생머리로 짙은 그늘을 내려 주고 있다. 그늘 아래 정자와 평상에서 신문도 펴고 발톱도 깎는 주민들은 폭염 속에서도 여유롭다. 길 건너 맞은편 버스정류장 위에 높게 치솟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그늘이 있고 안하천 건너는 안하교 앞에도 보호수로 지정된 4그루의 팽나무와 왕버들의 그늘이 차라리 어둡다. 안하천 제방 위에 늘어선 나무들까지 합하면 '숲골'이라 불렸던 유래를 알 듯하다. 학교이름으로 남았듯이 원래는 편안할 안(安)에 밝을 명(明)이었는데, 홍수 때마다 물이 들어 내 하(河)로 바꾸었다가 아래 하(下)의 안하리가 되었단다.
 
안하교 건너 용덕리 가영마을버스정류장을 지나 수조마을로 들어서면 마을회관 뒤편에 한말의 명필이자 문인화의 대가였던 아석(我石) 김종대(金鍾大 1873~1949) 공의 거연정(居然亭)이 있다. 상동면 대감리 출생으로 대눌과 소눌에 수학하고, 19·20살 때 두 차례의 과거에 낙방했지만, 서화에 끌린 흥선대원군에게 손자 이준용의 서예 스승으로 초빙되었다. 법부주사로 재직하던 31살 때의 단발령에 항거해 낙향하면서 "강호에서 십년 동안 가난한 옛 선비의 본분을 지켰는데 / 엉성한 재주가 어찌 감히 관직에 어울릴까마는 / 어버이 뜻을 어기고 녹을 훔친 것은 내 뜻이 아니었다 / 의복과 머리는 아직도 온전하니 다시 마음이 트이네" 라는 시를 남겼다. 단발령 거부와 홀로 사직했던 일은 당시 관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후 영남선비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며 이름을 알리고 거연정에서 제자를 길렀다. 서예에 대해서는 선인의 법에 기초할 것과 획과 자의 뼈와 살, 그리고 기이함과 단아함 사이의 중용을 가르쳤는데, 그 예맥이 수암 안병목을 거쳐 전 김해문화원장 운정 류필현과 한산당 화엄선사로 이어졌다. (김해뉴스 2012년 4월 12일자 참조)
 
▲ 안곡교와 안곡정류장, 안곡천.
수조마을을 서쪽으로 나서면 신천리 경계의 덕촌마을이 용덕리 북쪽 끝에 있다. 신천리 금음산에서 내려오는 시내가 한림 쪽으로 용처럼 흘러 용덕리가 되었단다. 1950~196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단층 타일건물의 덕촌의원과 붉은 벽돌의 첨탑이 예쁜 '꿈이있는교회'(담임목사 황선일)가 있다. 누구와 착각한 건지 노동자처럼 보이는 외국인이 손을 흔든다. 같이 손을 흔들다 차를 돌려 안하교로 돌아온다. 2007년 2월 조성의 안하농공단지에는 현재 28개의 중소기업이 입주해 있다. 안하천을 따라 오르다 안곡교(2003.3)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안골'의 안곡(安谷)마을로 들어선다. 마을회관을 지나 느슨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막다른 곳에 좀 특별하게 생긴 제석궁이란 사찰이 나오는데, 그 안쪽에 1972년 2월에 도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안곡리삼층석탑이 있다. 폐사지에 나뒹굴던 3장의 지붕돌과 1장의 몸돌에 새 부재를 보태 매몰돼 있던 기단 위에 삼층석탑으로 복원했다. 1층 몸돌의 4면에는 얕은 부조의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다. 3층 지붕돌의 체감비율이나 넓은 기단에 비해 아주 좁은 몸돌과 지붕돌 때문에 고려석탑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지붕돌의 주름은 통일신라의 5줄로 표현되었다.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탓에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나만의 보물'로 여기는 '팬'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역시 '안쪽 골짜기'의 안골인 모양이다.
 
▲ 감분마을 노거수들.
안곡교 앞 버스정류장까지 내려와 안하천을 따라 안곡로로 삼계고개를 넘는다. 지난 번 폭우 때는 안하천에서 무서울 정도의 악취가 나더니 폭염의 오늘은 오히려 깨끗하다. 탑골로도 불리는 중리(中里)와 저수지가 있는 안덕(安德)마을을 지난다. 산꼭대기의 상리마을이 보일 즈음 예고편처럼 예쁘지만 키 큰 반송 한 그루가 나타나고, 곧 이어 신선대에 무리를 이룬 멋진 적송들이 등장한다. 100살 이상의 소나무 몇 그루지만 혼자 보기가 아깝다. 마을의 당산나무로 모셔져 매년 정월 14일엔 산신제·당산할매제·거리제를 함께 받는단다. 마을회관을 지나 동쪽 용당산(龍堂山)과 서쪽 봉산(鳳山) 사이의 삼계고개를 넘는다. 여기부터 시내 삼계동이니 한림면 순례는 막을 내려야겠지만, 고갯길 끝자락에 있는 감분마을의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는 소개해야겠다. 1973년 입추에 은행나무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행단송비(杏亶頌碑)에 따르면, 약 300년 전에 들어와 살던 남평문씨 집안이 약 200년 전쯤에 선조 문익점이 산청군 단성면에 목화씨를 시배하며 심었던 600살 나무에서 묘목을 얻어 옮겨 심었다. 옆의 회화나무도 비슷한 나이로 생각되는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문익점과 우리지역이 이렇게 이어지는 게 신기하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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