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모영 수필가.
허모영 수필가.

서산에 걸린 해가 순식간에 넘어가 버리고 어둑살이 퍼진다. 밤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걸 보니 동지가 다가오고 있나보다. 어릴 적엔 동지 즈음에 치르는 의식이 있었다. 방마다 문짝을 떼 입안 가득 물을 머금고 푸푸 불어서 한 해 동안 누렇게 바래고 여기저기 바람구멍이 난 창호지를 뜯어냈다. 시커멓게 묵은 때가 앉은 문짝은 수세미로 깨끗이 씻어서 축담에 주욱 줄을 세워 말렸다. 어머니는 하얀 풀을 한 솥 끓여서 미리 식혀 놓으셨고, 아버지는 대청마루에 창호지를 문짝 크기에 맞게 잘라서 포개놓으셨다.
 
풀비로 한지에 풀이 발려지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창호지를 맞잡고 문짝에 발랐다. 문살에 한지가 잘 붙어지도록 마른 빗자루로 빗질을 하고 나면 우리 형제는 햇살이 잘 드는 송고방 앞으로 문짝을 옮겼다. 깨끗하게 새단장하고 문풍지까지 발라 겨울 채비를 마친 문들은 햇살을 환하게 들였다가 밤이 되면 하얀 달빛을 가득 안아 들였다.
 
동짓날 아침에 일어나면 대청마루에는 소반에 초 한 자루와 팥죽 한 그릇이 놓여져 있다. 어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팥죽을 쑤어 자식들이 금년에도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도록 도와달라며 기원하셨다. 처음 뜬 죽으로 정성을 올리고 집안에 귀신이 들지 않도록 팥물을 문마다 구석구석 뿌렸다. 
 
새콤하게 맛이 든 살얼음 일던 동치미와 따뜻한 팥죽은 어린 나이에도 감칠맛이 느껴졌었다. 우리 가족은 두고두고 그 팥죽을 데워 먹으며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었다.
 
어린 시절 동지팥죽은 신성한 음식으로 전염병을 물리치고 잡귀가 들지 않게 해주는 약이었다. 동지에 팥죽을 먹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동지라고 팥죽을 끓이는 집도 흔치 않다. 팥죽을 먹어야만 나이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코웃음으로 날려버리고, 팥죽을 뿌려 귀신을 쫓는다는 말을 했다간 비웃음만 살 일이다. 나도 어머니가 아니면 동짓날도 잊고 살아갈 것이다. 다행히 아직 건강한 어머니는 절기를 잊지 않고 해마다 팥죽을 끓여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신다. 그 덕분인지 우리 형제들은 잔병치레하는 사람 없이 모두 건강하다. 
 
어머니는 해마다 아침 찬바람을 가르며 죽을 들고 오셨다. 아직 이불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외손자들한테도 어김없이 '약이니 꼭 먹어야 한다'는 당부를 하였다. 아직도 첫 팥죽을 떠서 정성을 드리고 집안을 돌아가며 죽을 뿌리신다. 예전처럼 창호 문이 아니라서 문에는 뿌리지 않고, 고방도 없어져 싱크대 위에 한 양푼이를 떠 놓으시곤 남은 죽은 통마다 담아서 딸네들 집에 갖다 주신다. 연세도 많으신데 이제 하지 말라고 해도 아직 우리 어머니의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의식은 여전하다. 
 
문득 이렇게 해마다 동지팥죽을 잊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싶다. 물론 요즘엔 식당에서 맛보기로 팥죽을 주기도 하고, 동짓날 절에 가면 먹을 수도 있지만 내 어머니가 끓인 팥죽처럼 새알 하나하나에도 자식을 향한 기원을 담고 있는 팥죽은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약이다. 무라" 어머니 보약 팥죽 덕에 일 년 내내 무탈했다. 이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니 새벽같이 죽 보따리를 들고 오는 수고로움은 덜었다. 오래도록 어머니와 함께 동지팥죽을 먹을 수 있길.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