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치 화관을 쓴 듯 소나무 한 그루를 이고 선 용바위. 생긴 모습이 언뜻 보기엔 크로마뇽인 같기도 하고 도마뱀처럼 보이기도 해 재미있는 형상이다. 이곳에 서면 용지봉 능선과 낙동강 물줄기, 부산 도심, 구포와 다대포까지 조망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사진/나여경·소설가 nyk0417@hanmail.net
김해의 입장으로 볼 때 용지봉은 특별함이 있다. 신어산, 불모산, 무척산과 함께 김해의 주산(主山)이기도 하고, 가락국 신화가 골골마다 스며들어 있는 산이기도 하다. 이렇게 용지봉은 산 전체가 설화로 맺혀 있다. 특히 용이 노닐다 승천했다는 대청계곡과 산 정상에 용 발톱으로 할퀸 자국의 설화는 김해사람이면 다 알 정도다.
 
이번 산행은 남방불교의 전래자 장유화상이 축성한 용지암에서 시작한다. 장유암은 용지봉의 혈(穴) 자리이기도 하다. 자동차로 대청계곡의 임도를 편하게 오르다가, 용지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장유화상 불상 옆으로 난 산길을 들머리로 삼는다. 장유암 삼거리에서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724봉~용바위∼암릉구간∼능선사거리~장유암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피서객이 지나간 대청계곡은 한적하면서도 드푸른 물길이 투명하기만 하다. 임도 따라 추색(秋色)이 도는 수풀을 감상하며 산을 오른다. 굽이굽이 휘돌아드는 산길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이다. 울타리를 치듯 임도를 사이로 산줄기가 사방으로 둘러쳐 깊어만 가고 있다.
 
▲ 신어산과 임호산, 칠산 등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듯 좌우로 펼쳐진 용지봉 산줄기 아래 자리한 장유암.
한참을 임도 따라 물길 거스르듯 오르다보면, 용이 잠시 쉬다 승천한 곳 '장유암'에 이른다. 가락국의 어머니 허왕후의 오라비인, 장유화상이 축성했다는 장유암. 남방불교의 터전인 김해에서도 주요한 불교성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장유암에 이르니 장유시가지를 비롯하여 김해지역이 환하게 조망된다. 멀리 신어산과 임호산, 칠산 등도 보인다.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듯 용지봉 산줄기가 좌우로 어깨동무하듯 펼쳐져 있고, 장유암 대웅전의 용마루가 날아오를 듯 용지봉을 향하고 있다.
 
부도탑 계단을 오른다. 돌계단이 규격화되어 있지 않아 자연스럽다. 한 계단 한 계단 남방불교의 숨결이 감돌아 흐른다. 사리탑에 서자 장유화상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기단 위에 8각형 몸돌이 얹혔는데, 2층 부도의 돌이끼가 세월의 더께를 알려주고 있다.
 
탑 틈새로 고사리들이 푸른 잎을 힘차게 뻗어 올리고 있다. 장유화상의 불법이 아직까지 청청하게 서려있는 듯하다. 사리탑 정면에 돌기둥으로 주련을 만들어 놓았는데 글귀는 다음과 같다. '가락국사장유화상(駕洛國師長遊和尙)' '사리탑태안지정문(舍利塔泰安之正門)'
 
사리탑 주위로는 돌 울타리를 세우고, 기둥마다 불사를 도운 사람들의 이름을 정성스레 새겨놓았다. 장유화상의 긴 잠을 도닥이듯 손으로 울타리를 쓰다듬어 보니,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부도탑 앞 대웅전의 지붕 용마루에는, 꿈틀대는 용 두 마리가 용지봉을 향해 날아오를 태세다. 오호라~ 용지봉 정상의 용 발톱 자국이, 장유암의 대웅전 용마루에서 날아간 용들이었단 말인가? 용지봉을 울타리 치듯 둘러앉은, 산줄기 은밀한 곳의 장유암. 그 장유암이 용지봉의 혈 자리였음을 새삼 느낀다.
 
용지봉 산행 들머리가 있는 사천왕문 쪽으로 걸음 한다. 장유암은 사천왕문이 특이하다. 누각으로 만들어진 이곳은 복층 구조인데, 밑으로는 사천왕을 모시고 위로는 고루(鼓樓)를 모셔놓았다. 고루에서 다람쥐 한 쌍이 술래잡기 하듯 쪼르르 재미지게 놀고 있다.
 
▲ 장유화상 불상 옆 용지봉 오르는 계단 옆의 돌탑.
장유화상 불상 옆으로 용지봉 오르는 길이 열린다. 길옆으로 돌탑이 군데군데 쌓여있다. 용지봉 오르는 중생들의 염원들이 또 그렇게 쌓여있는 것이다. 산으로 들자마자 온갖 종류의 매미가 목소리 달리하여 울고 있다. 맴맴맴맴, 쓰르쓰르르, 왱왱왱… 마지막 여름의 끝자락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울어대고 있다.
 
용지봉 오르는 길은 다른 산과 달리 낙엽이 덜하다. 오로지 검은 흙길이 편하게 펼쳐진다. 칠흑 같은 흙이 참으로 매끄럽고도 윤이 난다. 길섶으로는 온갖 버섯이 불쑥불쑥 솟아나 있다. 식용여부를 모르기도 하거니와 그 자태들이 너무 예뻐,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호사스럽다. 마치 용이 승천하며 흘린 땀이 버섯으로 화한 것처럼, 산 곳곳이 버섯들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버섯과 함께 밤송이도 길 따라 데굴데굴 구르며 발에 차인다. 그들의 봄과 여름이 알알이 들어앉아 가을을 맛깔스레 맞이하고 있다. 밤송이 길을 오르며 흘린 땀방울도 밤톨처럼 알진 열매로 맺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 20여 분을 계속 오르니 장유암 사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이정표가 보이고, 벤치 두어 개 소슬한 바람 한 줄기 맞고 있다. 잠시 쉬며 가져온 오이와 포도를 먹는다. 먼저 온 바람과 희희낙락 하니 그 재미가 쏠쏠하다.
 
편안한 능선 길 따라 정상으로 오른다. 군데군데 돌 더미들이 길 따라 도열해 있고, 그 옆으로 용틀임하듯 소나무들이 하늘로 뻗어 오른다. 연달래 군락은 사람 키를 훌쩍 넘겨 제 키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서서히 오른쪽으로 김해시가지의 전망이 트인다. 신어산, 분성산도 보이고 칠산벌도 동그마니 펼쳐져 있다. 왼쪽으로는 창원 시가지와 거제 앞바다가 햇빛에 윤슬로 반짝이고 있다. 눈부시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정상에 다 와 가는지 바람이 서늘하다. 한 고비 오르니 불모산 자락이 그 긴 능선을 김해평야 쪽으로 늘어뜨리고, 오르던 길은 용틀임하듯 구불구불 나그네를 따른다. 구름 사이로 햇빛은 커튼 뒤로 빛을 쏟아 붓듯 내리쬐고 있다.
 
▲ 용지봉 정상 망루. 꿈틀대듯 이어지는 능선들이 장쾌하다.
곧이어 넓은 터가 사람 시선을 시원스레 반겨준다. 용지봉(龍池峰 723m) 정상이다. 용지봉은 용제봉(龍蹄峰, 龍祭峰)으로도 불리는데, 그만큼 설화가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는 산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정상석에는 용제봉(龍蹄峰)으로 기명되어 있다.
 
정상 주위로는 가을이 오는지 쑥부쟁이가 보랏빛 꽃잎을 한들거리며 서 있고, 꽃잎 위로 가을 햇살과 가을바람이 한들거리고 있다. 낙남정맥의 마루금이 장대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정병산과 대암산이 멀리 능선을 펼치고, 창원 쪽으로는 바다와 창원벌이 맞닿아 호쾌한 전망을 연출하고 있다. 온 산이 진달래 군락이라 봄에는 온통 붉은 꽃으로 불타오르겠다.
 
산을 내린다. 삼거리까지 다시 오솔길이다. 지루하지도 않은 길을 즐거이 내린다. 자잘한 오르내림의 능선 따라 가을빛이 서서히 선연해진다. 다시 용지암 사거리. 계속 능선을 탄다. 돌무지가 슬슬 시작되고, 주위로 억새군락이 꽃을 피우고 있다. 곧 724봉 정상. 창원 쪽 전망이 환하게 조망된다. 속이 다 시원스럽다. 나그네 따라 바다도 계속 산길을 따른다.
 
정상의 너럭바위에는 깨진 돌 틈으로 참나무 한 그루 도토리 몇 알 맺어놓았다. 그 질긴 생명력에 숙연함마저 든다. 진행하는 길로 불모산 정상과 화산이 고개를 내밀고는 산줄기를 김해 쪽으로 뻗어 내리고 있다.
 
▲ 용지봉 능선 암릉구간을 내려서면 만나는 사거리 갈림길. 여기부터 한적하고 안온한 오솔길이 장유암까지 펼쳐진다.
계속 길을 내린다. 좁은 수풀 터널을 헤치며 경사는 급박해진다. 돌무지를 계속 지나다 용바위에 선다. 마치 화관을 쓴 듯 소나무 한 그루를 이고 선 용바위는, 언뜻 보기에 크로마뇽인 얼굴 같기도 하고 도마뱀 머리 같기도 하다.
 
용바위부터 조망이 다시 환하게 터져 오른다. 바위 군락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분다. 모든 세상의 바람이 이곳에 모여 나그네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는다. 산등성이로 큰 구름 하나 흐르고, 산 줄기 사이 그 구름 그림자 하나 나그네 마음 속으로 흐르고 있다.
 
용지봉 능선도 한 눈에 펼쳐진다. 파노라마 펼치듯 양 산줄기가, 활개를 펴고 홰를 치듯 웅대하다. 너럭바위에 앉는다. 나무, 나무, 그리고 숲, 숲, 나머지 바람, 바람뿐인 이곳에서 홀로이 그 적막을 즐긴다. 너럭바위 이곳에서 나그네는 결가부좌 틀고, 장유화상의 마음으로 마냥 앉아있고 싶은 것이다.
 
▲ 용지봉 능선 암릉구간 철계단.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철제 사다리가 놓여 있다.
바위 하나 하나를 일별하며 암릉 쪽으로 길을 내며 산을 내린다. 용지암 능선 철계단을 오르고 조심스레 발 디디며 암릉을 내리니, 어느새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장유사 방면(0.6㎞)이고 오른쪽은 상점령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부터는 한적하고 안온한 오솔길이 장유암까지 펼쳐진다. '호젓하다. 평안하다.' 산기슭으로 그 마음 데리고 절로 향한다. 햇살이 오솔길마다 잠깐 잠깐 비추고, 산새들 왁자하게 우지진다.
 
이윽고 장유암 대웅전의 용마루가 보인다. 곧이어 너럭바위에 자잘한 돌탑들이 서 있다. 절로 들어서며 계단 하나 하나를 딛고 내린다. 마음 또한 공부하듯 뜨거운 가슴 아래로 고요히 내려앉는다.
 
물봉선 진분홍 꽃이 마음 한 곳에 빨갛게 점 하나를 찍는다. 갑자기 풍경소리가 '딸랑' 하고 바람에 흔들린다. 나그네 마음도 '딸랑' 하고 화들짝 깨어난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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