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깔끔하게 정비된 용전마을 대포천. 목재데크와 산책로, 정자 등이 물줄기를 따라 잘 정비돼 있고, 2008년부터 은어를 방류하는 대포천축제가 이어져 공장단지들로 삭막해진 상동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이른 아침 KTX로 서울을 가다 보니 지난번에 한탄만 거듭했던 감로사 터가 낙동강 너머로 따스하게 보였다. 아침 햇살 가득한 배산임수의 작은 마을이 그렇게 예쁘고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고려·조선시대의 명찰 감로사가 자리했던 이유가 새삼스러워지면서도, 절 대신에 가득 들어찬 공장들을 보며 "우리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뿌리치기가 참 어려웠다.
 
이제 탄식은 접어두고 상동순례의 걸음을 계속한다. 달 감(甘), 이슬 로(露), 감로리의 끝 마을인 화현마을을 지난다. 꽃 화(花), 고개 현(峴)'의 '꽃 고개' 마을이다. 낙동강변의 도로가 없었을 때, 남쪽 대감리 봉암마을로 넘어가던 유일한 고갯길이었다. 꽃이 많이 피어 그랬다고도 하고, 마을 앞 늪에 연꽃이 많아 그렇게 불렸다고도 했다. 고개이름이 화현이니 산 이름도 화현산이다. <경상도읍지>는 화현산에 감로사가 있다고 했지만, 많은 기록은 신어산의 감로사라 했다. 신어산의 동쪽 끝이 화현산이라 그렇게 불렸던 모양이다.
 
남쪽으로 매리를 향하는데 거대한 바위산 하나가 앞길을 가로막듯이 높게 솟아 있다. 도로를 내면서 앞부분이 깨져 나갔다는 '고바우'다. "고(그) 바우(바위)에 막혀 하룻밤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도 있지만, 높을 고(高)의 '높은 바위'일 수도 있겠다. 김해 표준말로는 '고방구'라고도 한다. 김해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 진영 출신의 고바우 김용환 화백이 생각났다. 바위 끝에 매달린 길을 돌아나오다 보니 매리취수장 정문이 있다. 부산시민의 식수원이지만 행정구역은 김해시 상동면 매리에 속해 있다. 2006년부터 김해시의 공단조성계획과 부산식수원의 안전이 법원까지 가는 '환경갈등'을 불러일으켰고, 2년만에 양보와 타협으로 봉합되기도 했다. 1986년 6월 개장 이후, 하루 172만t의 낙동강 물을 취수해서 아랫쪽의 덕산정수장으로 보낸다. 여기서 공급되는 수돗물이 부산은 물론, 김해시 대동면의 덕산과 월촌, 그리고 진해의 웅동까지 보내지고 있다.
 
▲ 산골짜기를 따라 빽빽하게 들어선 매리공단.
몇 가구 남지 않은 윗매리와 아랫매리를 지나는데, 강쪽은 4대강사업으로, 산쪽은 택지개발로 어수선하다. 산쪽에 강쪽 주민들의 이주단지가 조성되고 있지만, 결국 임자는 바뀌어 전원주택단지가 될 모양이다. 옛 매리교(1970.2) 안쪽에 놓인 매리1교(2007.2)로 대포천을 건넌다. 급조된 듯한 온갖 메뉴의 식당들이 어수선하게 늘어서 있다. 남쪽의 소감천 계곡을 가득 채운 매리공단 노동자들의 에너지원이 되는 모양이다. 어지러운 간판과 제멋대로 주차해 있는 차들, 공사판의 대형트럭이 날리는 먼지가 희뿌연 혼돈 속에서도 밥은 맛있고 사람들의 활력은 넘쳐난다. 이 어수선한 동네가 매리의 중심이 된 포산(浦山)마을이다.
 
대포천(大浦川) 하구의 매리1교에서 낙동강쪽을 내려다 본다. 옛날에 산림경비원의 눈을 피해 벌목해 만든 장작을 구포와 하단까지 실어날랐다는 포구가 있고, 신어산의 끝줄기는 포구까지 내려와 있다. 포구의 우리말 '개'에 입구의 우리말 '목'이라 '개목이라 불렸는데, 개 포(浦)에 목 항(項)의 한자가 붙어 포항(浦項)이 되었다. 좀 작긴 해도 김해에도 포항이 있다. 매화마을이라 매리(梅里)라 했고, 매화꽃이 땅에 떨어져 자손이 번창할 명당이라 매화마을이라 했다는데,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변해가는지 모르겠다. 강 건너의 원동마을에서는 봄마다 원동역 뒷산을 하얗게 뒤덮은 매화들이 축제로 손님을 맞이하는데, 이쪽의 매화마을은 전혀 다른 팔자가 되었나보다. 이름이 포항(浦項)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 소감천과 만나는 서물천 가에 나란히 선 고목들. 새로 지어진 소감마을 회관과 어우러져 옛 전경을 전한다.
식당거리 남쪽에서 소감천을 따라 오르면 골재나 시멘트회사들의 높은 사일로가 나타나는데 매리공단의 시작이다. 공장으로 마을은 없어지고 다리에 이름만 남은 양달교에서 소감천을 건너 소감마을로 들어선다. 소감천과 만나는 서물천 가에 나란히 선 몇 그루의 고목들이 새로 지어 단아한 마을회관과 어우러져 옛 마을의 전경을 전하고 있다. 이번엔 신촌교로 소감천을 건너 골짜기를 오르고 또 오르는데도 공장들의 행렬은 끝날 줄을 모른다. 마을회관과 교회(1963.1, 담임목사 정순길) 외엔 모두가 공장들뿐이다. 신촌(新村)마을은 원래 1963년 1월에 소록도에 있던 음성 한센병 환자들 30가구의 이주로 새로 생긴 '새마을'이었다.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박근혜와 함께 세 차례나 다녀갔을 만큼 관심을 보였단다. 요양하기 좋았던 깊고 깨끗한 골짜기는 옛말이 되었고, 꼭대기에 뜬금없이 나타나는 운동장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250개 업체의 파란 지붕들이 차라리 장관이다. 산골짜기의 경관에 맞춘다고 파란지붕으로 통일한 모양이지만, "녹색이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하다, 부질없음에 이내 머리를 털고 탈출하듯 산을 내려온다.
 
▲ 철과 구리가 생산됐던 금동산 기슭 동철골.
다시 매리1교까지 나왔다가 상동농협을 지나 대포천과 나란히 가는 상동로를 따라 대감리로 향한다. 마을과 동떨어져 상동로 변에 혼자 있는 묘한 입지의 은행 2개를 지나, 길가의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 있는 포산경로당을 지난다. 대구부산고속도로의 교각 앞에서 대포천과 황금들판을 건너면, 금동산(琴洞山) 기슭에서 철과 구리를 생산하던 동철골(銅鐵谷)이 있다. 50년 전까지도 철광석을 채취했는데, 마을 뒤 산 중턱에는 철광석이 산처럼 쌓여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구리와 쇠를 캐면서 마을이 생겼다는데, 일제강점기에도 철광산으로 경영되었단다. 여기서 대포천을 조금 거슬러 오르면 2010년 10월에 슬래그(쇠똥), 목탄, 소토, 철광석, 숯가마 등이 발견되었던 우계리제철유적이 있다. 발견 당시 이곳 동철골에서 철광석의 공급 가능성이 주목될 정도였다. 근처의 철 생산 관련 유적과 구전들은 대감리(大甘里)의 옛 이름인 감물야향(甘勿也鄕)과 잘 통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향(鄕)은 제철 등 수공업 천민집단의 거주지로 유명하고, 달 감(甘)은 담금질, 물(勿)은 담금질에 사용되던 '워터'에서 비롯되었다. 제철에 관련된 많은 지명에 '달 감(甘)'이 포함되는 것은 이런 이유였다. '달 감(甘)'이라고 '물맛이 좋은 동네'라거나, '북쪽에 있는 동네'나 '달무리 마을'에서 유래되었다는 속설도 있지만, 김해의 상동과 대동에 '감(甘)' 자가 붙는 대부분은 철 생산 관련의 지명이다. 상동의 감로(甘露)·소감(小甘)·대감(大甘)이 그렇고, 대동의 감천(甘泉)도 그럴 것이다. 조선 초의 <세종실록지리지>는 대감리를 감물야촌(甘勿也村)으로 전하면서 제철과 세트 관계에 있는 자기소(磁器所)의 존재를 전하고, 예종 원년(1469)의 <경상도지리지>는 정철(正鐵) 479근을 김해부 동쪽의 감물야촌이 세공(歲貢)으로 바쳤다고 하였다. 동철골의 금동산이 지금은 거문고 금(琴)에 마을골짜기 동(洞)을 쓰지만, 원래는 구리 동(銅)에 쇠 금(金)이었을 것이다. 이 언저리에서 '철의 왕국 가야'를 증명하는 제철유적이 발굴될 것이다.
 
▲ 임진왜란 4충신 중 한 분인 이대형 공의 묘소.
동철골에서 금동산 자락을 따라 돌아 '팜스테이 청사초롱'을 지나면 봉암마을이다. 비만 오면 물에 잠기던 뜰이 대구부산고속도로와 상동나들목이 생기면서 홍수를 막아 부자마을이 되었단다. 원래 풍수에 말 1만 마리가 지나는 부촌이 될 거라는 예언이 있었다는데 그 말이 맞았단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이 마을을 두 번씩이나 찾은 이유는 임진왜란의 4충신 중 한 분인 이대형(李大亨) 공의 묘소를 찾기 위함이었다. 이번 상동순례는 2010년 12월에 김해문화원이 공들여 간행한 <상동면(上東面) 마을사료집>에 크게 의지하고 있던 터라, 지난 추석 때 못 찾았던 묘소를 허모영 전 김해문화원 사무국장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회관 뒷길 오른편에 쓰러져 가는 사당 뒤의 산길을 오르다 보면 10분 정도의 거리에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활지가 나타나는데, 그 윗쪽의 왼편 숲속에 두 아들 우두(友杜)와 사두(思杜)의 묘를 거느린 공의 묘소가 있다. 묘비에는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관천(關川) 이선생(李先生)의 묘(墓)'와 '부인 고창 오씨(吳氏)의 합사(?)'가 새겨져 있다. '증(贈)' 이하는 사후에 받은 벼슬이고, 관천(觀川)은 삼방동의 신어천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냇가의 정자에서 책을 읽던 관천거사의 호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바쳐 김해성을 사수하던 공로는 잘 알려진 사실이나, 공의 묘소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마을회관 근처에라도 안내판을 세워야겠다. 아래 우두 공의 묘소에는 봉분이 없다. 김해성에서 분사한 부친을 찾아 나섰다가 왜병에게 살해돼 시신을 찾지 못했던 모양이다.
 
▲ 상동면사무소 건축비를 희사한 김복태 공 송덕비.
상동나들목과 상동119안전센터를 지나, 농협·대감마을회관·우체국·파출소(소장 박정석)·면사무소·보건지소·대포천작은도서관·상동교회(1948, 담임목사 김옥동)가 모여 있는 상동면소재지 대감리에 이른다. 1980년대에 기부로 1층을 짓고 시가 2층을 지었다는 면사무소에서는 방성술 면장 이하 12명의 직원들이 1천670세대 3천680명(남 1천995)의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동쪽 담장 앞에 있는 2기의 공덕비는 면사무소 1층의 건축비를 희사했던 재일교포 송태헌 씨와 금동초등학교의 부지와 실습전답, 상동로의 대감리~매리 구간의 도로부지를 기부했던 김복태(金福泰) 공에게 감사하는 비다.
 
면사무소 건너편에 있는 금동초등학교에서는 늦은 시간인데도 몇몇 아이들이 교문 근처에서 놀고 있다. 1932년 8월에 4년제 공립보통학교로 시작해 80주년이 되는 올해 4천17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 김맹곤 김해시장도 이 학교 출신이다. 학생 81명과 유치원생 18명이 전창익 교장 이하 34명의 교직원들과 놀며 공부하고 있는데, '강변의 작은 영화학교'란 교육 프로그램이 독특하다. 1~3학년은 영화감상, 4~6학년은 영화제작에 참가하는데, 지난 16일에는 여섯 번째의 영화제를 열었다. 초등학생이 영화를 만든다? 전국에서 유일한 교육 프로그램이 아닐까 한다. 사진 찍으며 돌아보는 필자를 스스럼 없이 반기는 아이들은 이런 교육으로 크는 가 보다. 금동산을 배경으로 앉아 커다란 팽나무와 오래된 벚나무가 둘러싼 녹색의 전원학교로, 매년 상동면민체육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모든 면민들의 놀이터가 된다.
 
대포천을 넘어 들어가면 동구나무와 세트를 이룬 용전마을회관이 있다. 금동산에 기댄 북쪽골짜기의 굴바위골에서도 쇠를 캐었다 하는데, 산 너머 용산의 여차천에서 대포천으로 용이 다닌다 하여 용전(龍田)이 되었다 한다. 나오는 길에 용전교에서 바라보는 대포천의 풍경이 아름다워 제방 위로 난 코스모스 길을 따라 걸어 본다. 목재데크의 산책로도 있고, 물가엔 아담한 정자들도 있다. 2008년부터 은어 방류의 대포천축제가 시작된 무대가 되었다. 공장단지로 삭막해진 상동마을의 안식처로 되살아나는 모양이다. 면사무소 쪽으로 돌아오는데 내동천 너머로 금동초등학교 앞에 있는 상동탁주(사장 박대흠)가 보인다. '노통'이 귀향 후에 즐겨 마시던 막걸리다. 인제대 동료 교수 중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 좋은 지하수에 밀가루를 조금 섞어 톡 쏘는 맛이 일품이라나 뭐라나? 상동막걸리 한 잔에 다리도 쉬고 답사도 접고 싶지만, 정신 나갔던 지난 여름의 오류(8월 22일자 생림면 1편 참조)를 바로 잡기 위해 입맛만 다시며 지날 수밖에 없다.
 
▲ 롯데자이언츠상동야구장. 대감리 면사무소에서 장척유원지로 올라가는 길에 있다.
지난 여름 더위를 먹었던지, 상동면사무소 뒤편의 장척로 변에 있는 롯데자이언츠상동야구장과 상동에 있어야 할 상동요를 생림의 나전에서 인제대로 넘어가는 인제로 변에 있다고 했다. 참 턱없는 실수였다. 이제 바로 잡는다. 2007년 11월에 오픈한 롯데자이언츠상동야구장과 경성대에 출강하며 김해미술협회회장도 지냈고 지난 4월에 제8회 김해시공예품대전의 금상도 수상했던 김영성 작가의 상동요(上東窯)는 대감리 면사무소에서 장척유원지로 올라가는 길 가에 있다. 사과도 할 겸 상동요에 들렀더니 마침 김영성 작가와 부인, 그리고 제자 한 분이 흙을 만지며 전어회를 펴 놓고 있었다. 사과는커녕 도리어 얻어먹는 꼴이 되었다. 윗쪽 장척 자기소(磁器所) 자리의 가마터 얘기를 하다 깜깜해져 돌아오는데, 묵방고개 언저리에서 헤드라이트에 놀랐는지 어린 노루 한 마리가 얼음이 되어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대는 매우 놀랐겠지만,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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