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암과 불암, 강서의 경계에 선 가락고도비. 2년에 걸친 김해순례의 마지막 발길이 닿은 곳이다.
2010년 12월 1일 창간호부터 2년을 계속해 온 김해순례의 발걸음이 드디어 오늘 마침표를 찍는다. 시간에 쫓기던 자료찾기와 마을답사, 글짓기와 분량조절에 손톱을 깨물며 머리를 싸맸던 길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시내 9개동과 시외 1읍 7개 면의 역사와 사연 모두를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더라도 시내의 중심 '분산'에서 시작했던 발걸음이 중단 없이 동쪽 끝 서낙동강 가의 선암마을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글을 읽어 주시고 독려까지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 기획을 끝까지 수행하게 해주신 이광우 사장 이하 <김해뉴스> 여러분께도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어느 기자 말대로 2년 동안의 답사와 글쓰기에 얽힌 뒷얘기로 모처럼 푸근하게 에필로그를 장식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필자의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지난번에 걸음을 멈추었던 초정리의 사연도 다하지 못하였고, 예안리→주중리→주동리를 거쳐, 수안리의 선암까지 가려면 아직도 적지 않은 발품을 팔아야 한다. 점잖게, 그리고 우아하게 매듭지을 수 있는 팔자가 아닌가 보다. 오늘 걸음을 시작하는 안막마을은 행정구역상 대동면사무소가 있는 초정리에 속하지만, 동쪽 낙동강 가에 따로 떨어져 있어 원지나 초정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기러기 안(雁)에 천막 막(幕)을 쓴다. 많은 기러기가 날아들던 모래톱과 갈대밭이 1920년대의 간척과 1934년 대동수문의 완공 후에 부산 가는 길목으로 발전한 마을이다. 오히려 면소재지보다 더 번창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 운하교에서 북으로 본 대동운하.
대동면사무소 동쪽의 원지네거리에서 마을회관을 끼고 돌아, 동남로49번길을 따라 남쪽으로 간다. 중앙고속도로의 대동육교 밑을 지나, 운하교(運河橋, 1993.2)로 대동운하를 건너 안막1구에 이른다. 다리 위에서 보니 월촌의 월당나루에서 시작해 면사무소 앞을 지나 7.5㎞를 달려 온 대동운하가 이제 서낙동강으로 들어가려 한다. 대동농협유류취급소를 지나면 왼쪽 안에 안막1구 마을회관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붉은 벽돌에 은색 첨탑이 빛나는 대동중앙교회(1967.3, 담임목사 윤명근)가 있다. 조금 엉성하긴 해도 부동산·카센터·중국집·대동탕·대동의원·대동농협·할인마트 등이 상가마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상가가 끝나는 곳에 대동중학교가 있고, 학교 뒤로 안막2구 마을회관과 대동제와 대동수문을 관리하는 한국농어촌공사 대동지소가 있다.
 
▲ 부산과 김해 경계에서 본 대동화명대교.
1953년 4월에 김해대동고등공민학교로 개교한 대동중학교는 대동면 유일의 중학교로, 7개 학급, 154명(남 74)의 학생들이 정영권 교장 이하 29명의 교직원들과 공부하고 있다. 대동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교가에 백두산이 등장하고, 지난해부터 일본의 교토국제중고등학교와의 자매교류활동도 시작했다. 동남로에 나가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른쪽 아래에 대동어린이집과 대동면종합복지회관, 대동면운동장 옆에는 119안전센터와 대동면노인회관, 대동화명대교 밑을 지나면 대동보건지소가 있다. 지난 7월 10일 개통의 대동화명대교는 명칭 때문에 김해와 부산이 옥신각신도 했으나, 5년 5개월의 공사 끝에 1.5㎞의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다. 다리 상판을 경사케이블로 끌어당기는 사장교(斜張橋)로, 2개의 교각에서 뻗어 내린 초대형 부챗살이 수직케이블로 당기는 현수교(懸垂橋)의 광안대교에 비해 훨씬 아름답다. 다리의 개통으로 부산의 북구와 강서구, 부산의 화명동과 김해의 대동면 간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질 것이지만, 초정나들목(IC)으로 연결되는 김해 쪽의 도로개설이 늦어지고 있다. 1천20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데, 경전철 적자로 허덕이는 김해시의 재정마련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 대저수문.
대동화명대교 밑을 빠져 나오면 대동면의 경계석과 김해와 부산, 부산과 경남의 경계표지판이 서 있는데도, 조금 앞의 대저수문과 그 위의 대저교를 경계로 인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낙동강이 서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대저수문은 1934년의 건설 당시에는 대동수문이었다. 1978년 2월에 낙동강에서 서낙동강 사이가 부산시 강서구로 편입되면서 수문의 이름도 대저수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원래는 서낙동강을 건너다니는 배나루가 있었다 한다. 밝은 옥색으로 칠해진 수문 아래에는 적지 않은 강태공들이 붐비고 있다.
 
수문 아래서 서낙동강을 따라 가다 신정교에서 대동운하를 건너면 초정리의 남서쪽 끝 마을인 신정(新亭)마을이 있다. 초정나들목 밑에서 예안천과 만나, 북으로 거슬러 오르면, 마산교(2009.3) 앞에 마산마을이 있다. 예안리의 동남쪽 끝 마을이다. 뒷산이 마늘처럼 생겼다고 '마늘산(蒜山)'이라 했던 것이 '말산(馬山)으로 변했단다. 마산교 앞에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 위에는 사상의 강선대, 녹산의 범방대와 함께, 낙동강 3대 명승으로 유명하던 산산대(蒜山臺)가 있었다. 산산대와 마산 사이에 마을이 앉아 있는데, 영조 20년(1744)에 명지도의 소금을 모아 보관하기 위해 산산창(蒜山倉)이 설치된 곳이라 한다. 마을회관 앞을 지나 대동로 480번길을 따라 서쪽으로 나가면 마산마을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길은 여기서 좌우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가면 80여 가구의 신안(新安)마을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마산의 서쪽 끝자락이 대동로와 만나는 곳에 예안리고분군이 있다.
 
▲ 예안리고분군. 사적 제261호.
사적 제261호의 예안리고분군은 1976~1980년 부산대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300여 기의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 옹관묘 등의 다양한 가야 무덤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200개체의 인골도 발견되었는데, 가야인의 형질을 연구하는 중요 자료가 되고 있다. 인골들 중에는 앞이마가 심하게 후퇴한 10개체의 두개골도 있어, 당시 가야사회에서 '짱구'를 만드는 두개골성형의 풍습이 확인되었다. <삼국지>는 가야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치우칠 편(偏), 머리 두(頭)의 '편두'를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예안리의 발굴조사에서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두개골 중에는 머리에 원형구멍이 뚫린 것도 있어 가야시대의 두개골수술의 흔적을 보여주기도 했고, 뒷골이 열린 채로 숨진 것으로 보이는 5~6살 어린이 두개골은 두개골성형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다만, 고분군이라 해도 높은 봉토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지하유구의 보존을 위해 낮은 철책을 두르고 잔디를 덮은 평평한 사각형 땅이 있을 뿐이다. 노출전시관이나 '편두' 관련의 박물관 조성 같은 정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분군 서쪽 끝의 장시(長詩)마을을 지나, 시루골짜기의 시렛골에서 비롯되었다는 시례마을을 향해 대동로417번길로 접어든다. 동광육아원을 지나 예안리의 본 마을인 시례마을회관에 이른다. 원래 시례리였는데, 일제가 1914년에 초정리 일부를 합하면서 예안리로 고쳤단다. 서쪽 끝 시례마을의 '예(禮)'와 동쪽 끝 신안마을의 '안(安)'을 합쳤나 보다.
 
▲ 시례마을 당산 푸조나무. 430살 된 이 나무는 몸통 가운데가 둘로 나뉘어져 마치 두 그루의 나무가 한몸처럼 보이는 연리목 형상을 하고 있다.
시례장로교회(1903, 담임목사 엄양섭)를 지나 예안교로 예안천을 건너다 보니, 시례마을 어귀에 예사롭지 않은 노거수 세 그루가 열을 짓고 있다. 다가가 보니 안쪽에 있는 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다른 나무와 가지가 들러붙는 연리지(連理枝)가 아니라, 몸통의 위쪽이 서로 엉켜 한 몸이 되었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맹세를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 고 노래했던 장한가의 한 대목이 중국 서안의 화청지에서 보았던 장이머우 감독의 야외 오페라 장한가와 함께 떠올랐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니 두 그루가 아니다. 노거수 한 그루의 몸통 가운데가 썩어 들어가 둘로 나뉘게 되었고, 벌어진 각각의 나무껍질이 안으로 오므라들면서 두 그루처럼 되었다. 연리목이 아니더라도 430살 먹은 이 푸조나무는 충분히 존경받아야 할 연륜과 모양을 갖추고 있다. 아래쪽 두 갈래의 몸통이 위에서 하나가 되고, 높은 하늘 위에 우산살처럼 펴진 가지와 이파리는 '키다리아저씨'나 죽마 탄 광대가 양산이라도 편 것 같은 모양이다. 부정 탄다고 상여는 물론 상주도 얼씬 못하게 했고, 2003년 태풍 매미 때는 스님을 불러 부러져 떨어진 가지들을 위해 제를 올려줄 정도였다. 430년 동안 마을을 지켜준 '키다리아저씨' 같은 당산나무다.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부산외곽순환도로의 공사현장을 지나 정골(正谷)로 불리는 깊은 골짜기 끝까지 올라가니, 커다란 저수지 제방이 앞을 가로 막는다. 1946년에 대저, 가락, 명지의 상수도원을 구했던 시례저수지로, 예안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대동로로 돌아와 서쪽으로 성(城)고개를 넘으면 주동리(酒同里)다. 신축의 성안마을회관에 들렀다가, 운동장 공사 중인 대중초등학교를 찾는다. 성고개 안에 있다 해서 성안마을이라 했다. 대중초등학교의 이름에 대한 유래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행정구역명인 주동리의 술 주(酒)를 피하느라 그렇게 된 것 같다. '주(酒)' 대신 '대(大)'를 붙여보니, 초정리의 대동초등학교와 겹친다. 그래서 이웃 주중리의 '주' 대신 '대'를 붙였던 모양이다. 1946년 10월 대중공립학교로 개교하였는데, 지금은 87명(남 69)명의 학생들이 예붕해 교장 이하 19명의 교직원들에게 배우고 있다. 지난해엔 1986년 월드컵 아르헨티나 전에서 대포알 슛으로 한국의 월드컵 첫 골을 기록했던 박창선 감독을 초빙해 축구부를 창단했다고 한다.
 
학교 건너의 대동농협 대중지소를 지나, 주중천의 주중교(2001.8) 위에서 신어산 쪽을 바라본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위로 주동, 주중, 원동 마을이 부채꼴 같은 골짜기 안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중앙에 거대한 양송이처럼 보이는 팽나무를 목표로 주중천 오른쪽 길을 따라 주동마을회관으로 간다. 주부동의 동쪽이라 주동리라 했다는데, 주부는 황금술통 모양의 명당이라 술 주(酒)에 관청 부(府)를 썼다고도 하고, 주부(主簿) 벼슬을 했던 남명 조식선생이 살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주중천 건너 대동로269번길을 거슬러 올라 이제 막 준공된 주중마을회관을 지난다. 주부동의 중간마을로, 선유동(仙遊洞)으로도 불렸단다. 한참동안 집들 사이도 지나고, 레미콘공장도 지나고, 부산외곽순환도로 공사 중의 교각 아래도 지난다. 원동마을회관에서 다시 경사길을 꼬불꼬불 오르니, 작은 계곡 건너에 산해정(山海亭)이 붉게 익은 감나무 사이로 보인다.
 
▲ 혜향선원에 있는 300살 된 모과나무.
낙동강 동쪽에 퇴계 이황선생이 있다면, 서쪽에는 남명 조식선생이 있다고 했다. 조선 중종 때 남명선생이 30년 동안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조선 선조 21년(1588)에 착공했으나, 왜란으로 중지되었다가, 광해군 원년(1609년)에 안희·허경윤이 준공하여 신산서원(新山書院)이란 편액을 달았다. 순조 23년(1823)에 중건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광복 후에 중수한 지금 건물은 팔작지붕의 목조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학공간이 있고, 그 뒤에 숭덕사(崇德祠)가 있으나, 선생의 위패를 모시지는 않는다. 산해정을 나오면서 지나쳐선 안 될 것이 있다. 산해정 맞은편에 있는 지중해풍 건물의 혜향선원에 들러볼 일이다. 선원의 잔디마당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300살 넘은 모과나무가 있다. 이렇게 오래된 모과나무는 처음 본다. 그로테스크하게 이리저리 뭉치고 뒤틀린 연륜의 몸뚱아리에 어떤 섬뜩한 괴담들이 서려 있는 듯하다.
 
배가 가득했다는 선만(船滿)고개를 넘어 수안리로 나온다. 김해의 동쪽 끝이 되는 서낙동강의 강변마을이다. 물이 많다고 고려·조선시대에는 수다(水多)부곡이었고, '물안'마을이라 수안(水安)이 되었단다. 정자나무와 어울린 마을회관이 대동로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시내 불암동과 경계가 되는 선암(仙巖)마을은 동쪽의 신선바위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도로건설로 깨져 나간 지 오래고, 지금은 장어골목의 마을회관만 말쑥해졌다. 꼬박 2년을 걸었던 김해순례의 발걸음을 석양 속의 서낙동강에서 접기로 한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헐떡이는 김해순례가 되었다. 이제는 좀 그만 쫓기고, 사람다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