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로왕(金首露王)이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駕洛國)의 왕이 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알려진 구지봉 정상부. 여기에서 구간(九干) 등 200∼300명의 사람들이 모여 김수로왕을 맞이했다. 따라서 이곳이 바로 가락국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겠다. 사진/ 김해뉴스 DB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에는 구지봉을 '부(府)의 북쪽 5리에 있다. 분산(盆山) 중턱으로부터 서쪽으로 거북이처럼 엎드려 있으니, 수로왕(首露王)이 탄강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분산은 성(城)이 복원되어 있어, 김해시청을 비롯한 김해 중심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 분산이 김해 시내로 미끄러져 가다 허왕후 능을 지나 끝닿는 곳에 구지봉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2권 기이(紀異) 2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천지가 개벽한 뒤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고,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당시에는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명의 추장이 백성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42년 3월 정화(淨化: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하는 날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의 구지(龜旨:거북이 엎드려 있는 모양)봉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 200~300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은 숨기고 소리만 내어서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라고 하였다. 아홉 명의 추장이 '우리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소리가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라고 하였다. '구지입니다'라고 하니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새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너희들은 산봉우리 꼭대기를 파고 흙을 모으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펄쩍펄쩍 뛰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

   
   
아홉 명의 추장은 이 말에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이윽고 우러러 보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아 있을 뿐이었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金盒)이 싸여 있었는데,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뻐하며 백 번 절하였다. 잠시 후에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의자 위에 놓아두고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열두 시간이 지난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금합을 열어보았더니 여섯 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용모가 대단히 빼어났다. 이 여섯 아이는 각각 여섯 가야의 왕이 되었고, 김수로는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
 
▲ 구지봉 입구에 세워둔 영대왕가비(迎大王歌碑). 이 노래는 구지가(龜旨歌)로 더욱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신령스러운 임금을 맞이하는 노래라는 뜻의 영신군가(迎神君歌)라고도 한다. 끝에 붙은 '也'는 전체 문장의 끝을 표시하는 한문의 종결사로 노랫말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구지봉의 풍광과 수로 탄강의 사실을 시로 읊은 대표적 시인으로는 이학규(李學逵:1770∼1835)를 들 수 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천주교도로 오해받아 구금되었다가 전라도 능주(綾州:지금의 화순군)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황사영(黃嗣永)이 중국 베이징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발생한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김해로 옮겨졌다. 1824년 4월에 아들의 재청에 의하여 방면되었으나, 그 뒤에도 김해지방에 내왕하며 이곳의 문사 및 중인층과도 계속 우호관계를 가져 이 지역의 문화의식과 그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김해를 읊은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그 옛날 가야의 왕
여기 구지봉의 바위로 내려왔다네
하늘은 긴 끈을 늘어뜨렸지
푸른 이끼가 큰 자취에 흩어졌네
보고 또 본다 커다란 글씨
나그네가 저절로 공경하게 되네

往者伽倻王
降玆龜山石
玄穹墜長纓
蒼苔散巨迹
依依擘窠書
行人自踧踖
   
<이학규, 金州府城古迹十二首 贈李躍沼
(금주부성고적십이수 증이약소), 龜旨峯(구지봉)>
 


앞의 세 구절에서 시인은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늘어뜨린 줄에 의해 구지봉으로 내려와 왕이 되었던 사실을 읊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구절에서는 그 유적에서 느낀 감동을 표현하고 있다.
 

▲ 석봉 한호가 썼다고 알려진 구지봉석(龜旨峰石). 원래는 고대의 무덤인 고인돌이다.
구지봉의 서남쪽 모퉁이에는 조선 최고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가 써서 새겼다고 알려진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글씨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사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이다. 시인이 커다란 글씨라고 묘사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위대한 가락국 시조의 신성한 탄강이 있었던 자리에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물어 이끼가 끼어있다. 그래도 커다랗게 새겨진 글씨는 이곳이 바로 그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옛날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진 곳에서의 감동에, 빼어난 한석봉의 글씨에 대한 시인의 공경심이 어우러져 있는 시적 표현이 뛰어나다.


아도간 나는 노래한다네
여도간 그대 술 취해 춤을 추누나
때맞춰 바람은 따뜻할 뿐이요
머리 감은 듯 술 취해 벌게진 듯
구지봉의 산기슭
어떤 이 눕고 어떤 이는 움직였다네
아아! 나의 꿈을 해몽해보아
좋은 꿈이면 어떨까
오늘 얻은 것
알이여! 곯지도 깨지지도 말아라
많은 사람 웃으며 비웃는 소리
합은 뚜껑만 남았구나
합은 김씨가 되었다 하고
알은 석씨가 되었다 하네
서라벌의 임금
많은 이의 힘을 눌러버렸네
我刀我謌
汝刀傞傞
時維風和
如沐如酡
龜山之阿
或寢或訛
逝占我夢
吉夢如何
今日之獲
弗毈弗殈
羣笑赥赥
維盒有鼏
謂櫝爲金
謂卵爲昔
徐羅之辟
以屈羣力
   
<이학규, 啓金盒(계금합)>  


시의 제목은 '금합을 열다'로, 바로 김수로왕의 탄강이다. 첫 구절부터 열 번째 구절까지는 김수로왕이 탄강하던 그때의 흥분과 기대를 노래하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 '아도간 나는 노래한다네(我刀我 ) 여도간 그대는 술 취해 춤을 추누나(汝刀  )'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보전지습(甫田之什) 빈지초연(賓之初筵)의 분위기를 본뜬 것이다. 이는 잔치 자리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노래한 것으로, 사실은 술에 취하여 추태를 부리는 일이 없도록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 구절의 '어떤 이는 눕고 어떤 이는 움직였다네(或寢或訛)'는 <시경> 홍안지습(鴻雁之什) 무양(無羊)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말로, 300마리나 되는 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아도간이 이야기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시에서 아도간은 스스로 왕을 맞이하는 감동을 노래한다고 표현하고, 여도간은 술이 취해 춤춘다고 하여 나와 너 없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흥분된 마음으로 그들의 왕이 제대로 탄강하여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주었으면 하고 기도하고 있다. 그의 기도는 '알이여! 곯지도 깨지지도 말아라'라는 구절에서 간절해진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일장춘몽, 무참히 깨어지고 만다.
 
석탈해(昔脫解:57~80)는 김수로왕이 가락국을 세우던 시기, 그와 영토 및 권력을 다투던 상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결국 김수로왕에게 패한 그는 신라로 들어가 57년에 유리왕을 이어 왕이 된다. 가락국은 그렇게 다투던 석씨가 왕이 된 신라에게 결국 나라를 내어주고 만다.
 
이렇듯 대 가락국의 꿈이 무참히 깨어진 사실을 두고 시인은 가락국은 알을 담았던 금합의 두껑만 남았고, 당시 대결에서는 패배했으나, 신라의 왕이 되었던 석씨가 제대로 된 알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결국 화자인 아도간을 비롯한 9명의 간들과 이들을 믿고 따랐던 수많은 가락국 백성들의 힘은 신라의 위력에 눌려버리고, 위대한 왕국을 꿈꾸던 가락국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음을 시인은 그 역사가 시작되었던 현장에서 안타깝게 노래하고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