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사람들은 설을 앞두고 모처럼 가족, 친지와 어울릴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명절 때만 되면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 이주여성과 외국인 노동자, 새터민들이 그들이다. <김해뉴스>가 타향에서 설을 맞는 그들의 모습과 애환을 들어봤다.

"열심히 일한 대가도 못받고 이래저래 서러운 신세네요"

네팔 이주 노동자 판데 데비 씨

다른 나라에서 일을 하는 이주 노동자들은 명절이 서럽기 마련이다. 판데 데비(28·네팔) 씨는 부원동에 있는 채소 생산업체에서 일했다가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경우다. 그가 일한 업체는 비닐하우스에서 다양한 품종을 기른다. 여기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은 상추나 토마토 등을 키우고 한 달에 월급 103만 원을 받는다. 하지만 하루 몇 시간을 일하건 월급은 고정되어 있고 이마저 제때 받는 일이 없다.
 
데비 씨는 "아홉 달 동안 일하면서 제대로 돈을 받은 적이 없다. 지금은 일을 그만뒀지만, 지난해 11월과 12월, 두 달 분을 아직 못 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는 업체 경영이 어려워서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주 노동자들을 길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지급을 미룬다고 했다. 그는 "눈이나 비가 오면 일을 못할 때가 있는데 사장이 이를 핑계로 월급날 돈을 못주겠다고 한다"며 "그러면 해당 일수가 지나면 줘야 하는데 언제나 두 달 정도 미룬다"고 말했다.

업체 사장이 경영 어렵다며 임금 안줘
고용부에 진정서를 내긴 했지만 농업분야는 최저임금제 적용 안돼
억울한 심정으로 씁쓸한 명절 맞네요
저 같은 처지 외국인 한둘이 아닙니다


데비 씨는 임금체불 건으로 지난 1월 22일 고용노동부에 진정서를 냈다. 그는 그렇지만 "농업분야에서 일한 탓에 법적 다툼에서 불리한 점이 있어 걱정된다"고 했다. 농업분야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63조는 '노예법'으로 불린다. 최저임금에는 예외가 없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농업분야를 비롯한 몇몇 업종은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 "토지의 경작과 개간, 식물의 재식·재배·채취, 그밖의 농림 사업은 최저임금의 예외로 한다"는 조문 때문이다.
 
김해에는 데비 씨 말고도 억울한 심정으로 명절을 맞이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서상동 외국인 선교교회에서 만난 수베디 여가라즈(40·네팔 출신 한국인) 목사는 "지금 당장 그들을 부를 수 있다"며 연락을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열 명 남짓 되는 이주 노동자들이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체 뜨라(38·네팔) 씨는 4년 전 한국으로 와서 주촌면에 있는 공장에서 일했다. 프레스로 높은 온도의 플래스틱 합성수지를 찍어서 고무장갑 등의 제품을 만드는 곳이다. 야간수당도 못 받고 쉴 새 없이 일하던 어느 날, 프레스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면서 산업재해를 입고 말았다. 병원에서 잘린 손가락을 붙였지만, 화상이 겹쳐 손가락 두 개는 회복 불능 판정이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뜨라 씨는 합법적 체류기간이 지나 미등록 이주 노동자가 돼 버린 상황이다. 이럴 때에는 이주 노동자 보호단체에서 대신 진정서를 내준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부터 법무부가 단속을 강화해 사고를 당해도 신고를 꺼리게 됐다고 한다.
 
여가라즈 목사는 "법무부에서 미등록 노동자가 산재신고를 하면 보호소에 들어가 보상 절차를 진행하라고 요구해 난감하다"고 어려운 상황을 설명했다. 


"남자들만 편한 명절 낯설어 차례상 차림법도 어려워요"

결혼 이주 '한국주부 5년차' 장리춘 씨

곧 설이다. '살림 9단'의 베테랑 주부들도 '명절 증후군' 운운할 정도로 명절 쇠기는 만만찮은 일이다. 우리나라로 시집 온 결혼 이주 여성들은 어떨까. 지난 1일 결혼 이주 여성 장리춘(34·주부·중국) 씨를 만났다.
 
"중국에선 남자, 여자가 함께 일을 합니다.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주로 일을 하는 게 가장 큰 차이점 같아요. 중국에서는 차례를 안 지내고, 가족이 절에 가거나 집 밖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놀아요. 식사는 외식을 하는 경우가 많지요."
 
한국 생활 5년차인 장 씨에게 한국과 중국의 설 풍습 차이점에 대해 묻자 이같이 설명했다. 남편이 명절 때마다 한국 음식 만들기가 서툰 장 씨를 거들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에겐 남녀가 평등한 중국의 설 풍습이 그리운 모양이다.
 
중국에선 부부가 함께 집안일 하는데… 명절증후군이라는 거 정말 만만찮아요
아이들 교육 문제가 가장 큰 관심이죠
이번 설엔 동서들에게 상의해볼 참인데 저도 이제 한국 주부 다 된 것 같아요


"중국에서는 음력 12월 31일 밤에 가족이 둘러앉아 물만두를 빚어 먹어요. 동그란 주머니 형태의 만두는 '빠오즈'라 부르고, 초승달처럼 굽은 모양의 만두는 '짜오즈'라고 해요. 음력 1월 1일, 설날이 되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웃어른에게 세배를 하고 덕담을 나누죠. 물론 세뱃돈 문화도 있는데, 주로 빨간 봉투에 돈을 넣어줍니다. 또 집집마다 복(福)자를 써서 대문에 붙여놓아요. 복이 들어오길 기원한다는 뜻이지요."
 
음식을 만들어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는 한국의 풍습이 아직까지 그에겐 낯설다. 하지만 그는 남편, 시어머니, 동서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다 보니 한국 주부가 다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홍동백서, 좌포우혜, 어동육서 등 명절 차례상 차림법을 시어머니에게 배운 적이 있는데, 너무 어려워요. 나물을 무치고 떡국을 끓이는 등 평상시 만들어 본 적이 없는 한국 음식을 한가득 장만하다 보면 설 연휴가 금방 지나가더군요."
 
그는 명절이 되면 자신의 인기가 치솟는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명절 때마다 중국의 명절 풍습에 대한 이야기를 가족에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절 때마다 가족들에게 고향 이야기를 해줘요. 제 고향인 베이징의 볼거리와 먹을거리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다들 신기해 하지요. 지난해 3월에 고향엘 다녀왔는데, 올해는 아마 못 갈 것 같아요. 제가 만든 한국 음식을 고향의 어머니, 아버지께 맛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장 씨에겐 최근 고민이 생겼다. 올해 5세가 되는 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장 씨는 이번 설에 동서들에게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생각이다.
 
"한국어가 비교적 능숙해졌지만 뉴스를 보다 보면 아직 모르는 단어들이 많아요.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만, 제가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중국 이주 여성들의 모임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다른 중국 이주 여성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북한에선 대부분 양력 설 쇠 조상 섬기는 맘은 남북 같아"

10번째 남한 설 맞는 새터민 노천성 씨

"제가 어릴 적엔 설날 아침이 되면 어른들이 50전(한화 500원)씩 용돈을 주곤 했어요. 원래 북한에는 설날에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풍습이 없는데, 그땐 그랬어요."
 
남한에서 10번 째 설을 맞는 노천성(40·구산동) 씨. 2002년 12월, 중국을 통해 남한으로 넘어 온 새터민이다.
 
노 씨의 고향은 백두산을 끼고 있는 북한 양강도 혜산시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동북지방과 마주 보고 있다. 1998년 3월, 압록강을 건넌 그는 한 중국인 가정집에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훔쳐 타고 서울~부산 정도 되는 거리를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 중국 장백현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4년 동안 중국의 이곳 저곳을 떠돌며 생활하다 2002년 12월 남한으로 넘어 왔다. 2003년에는 우연히 중국출신(조선족)인 홍영란(35) 씨를 만났고, 이듬해에 결혼했다. 슬하에는 9세, 6세 두 딸과 네살배기 아들을 두고 있다.
 
그의 마음 한 켠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남아 있다. "꿈에 그리던 남한에 도착했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착잡했어요. 먹고 살기가 어려워 정든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이란 게 어디 쉽사리 잊혀지는 것인가요?"
 
늘 배고팠지만 설만큼은 달랐어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용돈도 받았죠
이젠 갈 수 없는 고향이라 더 그리워
어머니와 형도 남한으로 넘어와 다행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어 설이 즐겁죠


설이 되면 고향 생각이 더욱 많이 난다는 노 씨. 늘 배가 고팠던 어린 노 씨에게 설날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날이자, 용돈을 받는 날로 기억에 남아 있다.
 
북한의 설 풍경은 남한과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을까. 북한은 1967년부터 음력 설 대신 양력 설을 채택했는데, 1989년에는 다시 음력 설을 민속명절로 정했다. 하지만 아직도 음력 설보다는 양력 설을 더 비중 있게 쇤다. 그래서 북한 주민에게 설은 매년 1월 1일을 의미한다.
 
"설 전날에는 음식을 준비하고, 설날 아침에는 명태 한 마리, 고기, 떡, 두부, 지짐 등을 제사상에 올린 후 조상에게 큰절을 3번 드려요. 조상을 섬기는 마음은 남과 북이 똑같죠."
 
북한에서 친척이 한자리에 모이기란 쉽지 않다. 교통 사정이 좋지 않은 탓에 가까운 곳에 살더라도 몇날 며칠 발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길목마다 인민안전원(북한 경찰)이 지키고 서서 일일이 신분을 확인하고 이동증명서를 요구하기 때문에 한 번 길을 나서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003년 남한에 와서 맞은 첫 번째 설은 낯설기만 했다. "매년 양력 설을 지내다 음력 설을 쇠었으니 설이 명절처럼 느껴지지가 않았죠. 음력 설을 보내는 데 적응하는 데만 5년이 걸렸어요."
 
그리고 2008년에 어머니와 형이 남한으로 넘어 왔다.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그는 명절만 되면 마음을 졸이며 가족의 생사를 걱정했다. 지금은 어머니 등과 즐거운 명절을 보낸다는 그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더는 어릴 때처럼 설이 기다려지진 않지만,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낼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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