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왕후의 능.
앞에서 우리는 이광사의 시를 통해 허왕후가 바다를 건너 김수로왕을 만나는 장면과 이후 가락국의 기초를 이루어 나갔던 전체의 상황을 감상했다. 이제는 부분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와 이를 읊은 시들을 보기로 하자.
 
조선 후기의 시인 윤기(尹:1741∼1826)는 허왕후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김수로왕과 인연을 맺은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뒤 이를 시로 읊고 있다.
 
허 씨는 바다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펼치고 와서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명은 허황옥(許黃玉)이고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분이 황옥 부인이다. 보주태후(普州太后)·남천축국왕녀(南天竺國王女)·서역허국군녀(西域許國君女)·허황지국(許黃之國)이라고도 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동방에 가락원군(駕洛元君)이 있는데, 여인을 얻어 배필로 맞으려 한다'고 하기에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였다. 아홉 아들을 낳아 두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으니, 지금 김해 김씨와 허씨가 바로 이들이다.


우리나라는 그 옛날 알에서 태어난 이 많았지
박혁거세 고주몽 석탈해가 모두 그러하였고
수로 또한 더욱 기괴하였지
여섯 개 알 껍질 열리자마자 장성하였다네

왕비 허씨는 또한 어떠하였던가
붉은 돛 붉은 깃발로 바다 물결 건넜지
아홉 아들 중 두 아들이 어머니 성 따라
지금도 김해에는 허씨와 김씨 많다네

我東古昔卵多生(아동고석란다생)
居世朱蒙脫解幷(거세주몽탈해병)
曁玆首露尤奇怪(기자수로우기괴)
六殼纔開已長成(륙각재개이장성)

王妃許氏又如何(왕비허씨우여하)
緋帆茜旗越海波(비범천기월해파)
九子二人從母姓(구자이인종모성)
至今金海許金多(지금김해허김다)

   
 <윤기, 영동사(詠東史), 64, 65>  


<삼국유사> 권 제2 '가락국기' '수로왕보주태후허씨능(首露王普州太后許氏陵)'조에는 허왕후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절을 짓고 불법(佛法)을 받드는 일이 없었으며, 불교가 전해지지 않아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 知王:재위 451~492) 2년에 그 곳에 절을 지었으며, 또 왕후사(王后寺)를 창건하여 지금까지 불교를 받들고 있다. 이는 눌지왕(訥祗王:재위 ?~458) 때 아도(阿道) 화상(和尙)이나 법흥왕(法興王:재위 514~540)보다 이전이다. 아울러 남쪽의 왜놈들을 진압하였으니, 역사 기록에 실려 있다. 탑은 네모 반듯한 4면 5층으로, 새겨진 조각은 대단히 뛰어나다. 돌은 약간 붉은 얼룩무늬로 그 바탕은 아름다우면서도 무르니 이 지역의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에서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가 붉은 돛, 붉은 깃발을 달고 바다를 건너오자 왕은 궁궐 안에 전각을 설치하고 그를 기다렸다. 왕후는 높은 언덕에 배를 매어두고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께 폐백을 올렸다. 왕이 휘장 전각으로 맞아들였다가 대궐로 돌아가서 왕후로 삼았으니 이가 허왕후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이 지난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모두 합하면 300결(結:1결은 15만447.5㎡)이나 되었다.
 

▲ 장유사 본당과 입구 뒤편에 있는 장유화상(長遊和尙) 사리탑.
장유사는 김해시와 창원시의 경계인 불모산(佛母山) 또는 장유산(長遊山)에 있다. 위 <삼국유사>의 기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서 왕후사는 김수로왕과 허왕후가 장막을 치고 첫날밤을 치렀던 곳에다 세운 절이라고 한다. 또한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절을 지을 당시 세웠다는 장유화상사리탑(長遊和尙舍利塔:장유화상은 허왕후의 오빠 허보옥(許寶玉)이라고 한다)이 남아 있으며, 절에서 오른쪽으로 60m 아래에는 장유화상이 최초로 수도했다는 토굴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장유사 입구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폐사가 된 왕후사터(王后寺址)가 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 불교의 전래가 김수로왕이나 질지왕의 시대에 이루어졌거나 북방이 아닌 남방으로 수입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달리 드러나지 않는 한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인도에서 불교의 교리나 파사탑, 쌍어문(雙魚紋:수로왕릉 봉분 입구의 납릉정문에 그려진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그림)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그리 쉽지 않다. 여기에 논란을 더하는 것이 있으니,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에 있는 명월산(明月山) 흥국사(興國寺)다.
 
▲ 흥국사에 있는 가락국태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王迎后遺墟碑).
1706년(숙종 32) 증원(證元)이 지은 명월산흥국사사적비문(明月山興國寺事蹟碑文)에 따르면, 이 절은 48년 금관가야의 수로왕(재위 42∼199)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수로왕은 명월산에서 허왕후를 맞아 환궁하였는데, 왕후의 아름다움을 달에 비유하여 산 이름을 명월산이라 하였고, 근처에 명월사(明月寺)를 지어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또 왕후와 왕자들을 위해 진국사(鎭國寺)와 흥국사를 지었다고 한다. 1706년(숙종 32) 수리를 할 때 담 밑에서 '144년 3월 장유가 서역에서 들어와 불교를 전하니 왕이 깊은 마음으로 부처를 숭배했다'는 글이 적힌 유물을 발굴하였다고도 한다. 근래에는 코브라가 불상을 떠받들 듯 고개를 들고 있는 석물이 명월사터에서 발굴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법당 오른쪽에는 가락국태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王迎后遺墟碑:가락국 태왕께서 왕후를 맞이한 곳)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불교의 전래와 허왕후의 족적에 대한 연구가 더욱 깊이 진행된 후에라야 바로 이곳이 김수로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난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결론을 쉽게 말하기가 어렵다.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자면, 허왕후는 바다를 통하여 신하들이 기다리고 있던 망산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김수로왕이 기다리는 곳으로 이동하고 서로 만나 가락국의 미래를 준비하였다. 장유사와 흥국사 어떤 곳이 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곳인지 분명히 말하기는 무척 어렵다. 이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둘의 만남이 바로 가락국 500년의 아름다운 바탕이며, 출발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허훈(許薰:1836~1907)은 장유사에서 세 수의 시를 남기고 있는데, 이는 뒤에 김해의 사찰들을 읊은 시를 감상할 때 다시 보기로 하고 이제는 다시 허왕후의 능으로 가보자.
 
<조선왕조실록> 정조 16년(1792) 4월 7일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허왕후의 능은 성 북쪽 2리쯤 되는 구지봉의 동쪽에 있는데, 구지봉은 바로 수로왕이 탄생한 곳입니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두 능은 서로의 거리도 2리쯤 되고, 봉분 쌓은 것과 설치한 물건은 수로왕릉과 같으며,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보주태후허씨능(首露王普州太后許氏陵)'이란 열 글자를 썼습니다. 돌담 전면에 세 개의 문을 설치하였고, 다른 전각들은 없습니다. 제각(祭閣 : 무덤 옆에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집)은 4칸인데 정자각(丁字閣 : 왕릉 봉분 앞에 '丁'자 모양으로 지어 놓은 제각)의 제도를 사용하였고, 부엌 4칸, 재랑(齋廊 : 제사를 모시기 위해 준비하는 집) 4칸, 재실(齋室) 4칸으로 바로 옛 회로당(會老堂)-뒤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입니다. 허왕후의 능은 수로왕의 능에서 거리가 다소 멀어 이미 같은 구역 안이 아니고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허 왕후의 능에는 제각이 없으므로 전부터 제사 지낼 때 수로왕릉의 제각에서 함께 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조선조 당시 허왕후릉과 수로왕릉의 위치 및 제각의 규모와 제사 의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허왕후릉에 제사를 올리듯 허왕후의 출현에 대한 칭송이 가득한 악부시를 한 수 보자.
 

산에는 돌 있고 바다에는 물결 있네
바람이 부드러워라 나에게 불어오네
복이 드리웠어라 만년이로다
우리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게 하네

山有石兮海有波(산유석혜해유파)
風冉冉兮送余(풍염염혜송여)
宜福綏兮萬年(의복수혜만년)
使我人兮說譽(사아인혜설예)

   
<이영익, 東國樂府(동국악부) 迎茜旗(영천기)>  


위 시의 작자 이영익(李令翊:1740∼?)은 앞에 소개한 이광사의 둘째 아들로, 이 시는 아버지의 <동국악부>에 화답한 것이다.
 

▲ 허왕후의 능 바로 앞 오른쪽에 파사탑이 있다.
산에는 굳건한 바위가 있고, 바다에는 힘차게 일렁이는 물결이 있다. 허왕후의 배를 밀어주던 그때의 그것인 양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는 김수로왕의 굳건함이고 허왕후의 힘이며, 천지자연의 축복이다. 가락국은 김수로왕의 굳건함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여기에 허왕후의 힘이 더해졌을 때 영원한 복이 드리워 자랑스러운 나라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제 이학규(1770∼1835)의 시를 마지막으로 감상하며, 허왕후의 능과 이별하자.
 

듣자하니 파사 임금께서는
돌을 싣고 동쪽 바다로 오셨다 하네
풍경은 반나마 사라져 버렸고
불화는 무늬를 감추어버렸네
마주하고 수로왕릉을 가리키나니
우뚝하여라 천 년을 지내왔도다

嘗聞婆娑君(상문파사군)
載石來東海(재석래동해)
凮鈴半銷沈(풍령반소침)
梵畵晦文采(범화회문채)
相指首王陵(상지수왕릉)
岹嶢閱千載(초요열천재)

   
<이학규, 金州府城古迹十二首 贈李躍沼(금주부성고적십이수 증 이약소) 婆娑墖(파사탑)>  

 
앞의 <삼국유사> 기록에서 보면 허왕후가 싣고 온 탑은 약간 붉은 무늬의 돌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기고 5층으로 쌓은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그 돌탑의 풍경(風磬)은 거의 사라져 딸랑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아름답게 조각되었던 불화의 무늬는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바람을 잠재우고 왜구를 물리치는 기운만은 영원히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허왕후의 기운이다. 이제는 무덤으로만 남아 있으나 그 기운은 수로왕릉의 위엄과 더불어 천 년 세월을 우뚝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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