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역은 뒤로는 분성산(盆城山)을 머리에 이고, 그 아래로 호계(虎溪)의 흐름을 가슴에 안은 구산동(龜山洞), 대성동(大成洞), 서상동(西上洞), 동상동(東上洞), 회현동(會峴洞), 부원동(府院洞)이다. 일제시대 이후 오랜 세월 고고학자들이 한겹 한겹 세월의 두께를 벗겨본 결과 이 동네들은 모두 가락국을 땅속에 묻어두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이곳이 바로 가락국의 핵심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조개무덤, 고대인들의 주거지, 고인돌, 고대 귀족들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 등이 수없이 발견되었다. 이는 마치 경주 반월성(半月城)을 중심으로 신라 왕들의 무덤 및 성곽, 생활 흔적 등이 형성되어 있어 이곳이야말로 신라의 중심이었음을 말해주는 것과 같다. 반월성을 중심으로 한 주변이 그러하듯 김해에서 이에 버금가는 가락국의 흔적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봉황대(鳳凰臺)다.
봉황대는 1870년 김해부사로 부임한 정현석(鄭顯奭:1817~1899)이 구릉의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편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여러 차례 발굴되었는데, 그 결과 저습지와 구릉이 조화를 이루어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는 사실과, 많은 건물과 생활의 흔적들이 확인되었다.
새롭게 개발되어 아파트촌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공단이 형성되어 있는 주변의 마을이 김해의 새로운 기지개라면, 봉황대를 중심으로 한 마을들은 현재의 김해와 미래의 김해를 잉태하고 생산한 모태요, 원동력이며, 김해의 상징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가락국의 위치와 경계를 설명하고 있으니,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으로는 푸른 바다, 서북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 동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 남쪽으로는 나라의 끝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자면 당시 가락국은 동북쪽으로 지금의 밀양까지,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양산과 부산시 북구·사상구·사하구와 마주하고, 서북쪽으로는 지금의 진주·산청지역까지, 남쪽으로는 바다까지 펼쳐져 있던 나라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가락국의 중심은 여전히 봉황대 주변이었음은 예나 지금이나 부정할 수 없다. <삼국유사>에는 김수로왕이 나라를 정비하고 궁궐을 조성하여 가던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시 궁궐을 짓게 하고 왕이 들어갔으나, 질박하고 검소하게 하려고 지붕의 이엉을 자르지도 않았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석자였다. 즉위한 지 2년만인 봄 정월에 왕은 '내가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임시로 지은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에 행차하여 사방의 산을 바라보다가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이곳은 마치 여뀌잎처럼 좁지만, 빼어나게 아름다워 16나한(羅漢 : 불교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성인)이 머물 만한 곳이다. 더구나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7성(七聖:불교에서 일곱 가지 진리를 밝게 나타낸 사람)이 머물 만한 곳으로, 참으로 알맞은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참으로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1천500보(步) 둘레의 외성(外城)과 궁궐,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 창고, 곡식 창고 지을 곳을 두루 정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국내의 힘센 장정과 기술자들을 두루 불러 모아 그달 20일에 튼튼한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일을 마쳤다. 궁궐과 건물들은 농한기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해 10월 안에 짓기 시작하여 다음해 2월이 되어서 완성하였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궐로 옮겨 가서 모든 정치의 큰 기틀을 살피고 여러 가지 일을 신속히 처리하였다.
위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자면 김수로왕은 신답평, 즉 새로 논을 조성하여 농사를 짓게 된 들판의 북쪽에 임시 궁궐을 지어 머물다가, 2년 뒤에야 신답평에 궁궐을 조성하고 옮기게 된다. 과연 처음으로 궁궐을 지었던 곳은 지금의 어디였으며, 새로 옮긴 신답평의 궁궐은 지금의 어디일까?
<조선왕조실록> 단종 2년 7월 10일의 기록에는 '경상도에 큰 비바람이 일어 바닷물이 불어 넘쳐 김해 고성(古城) 밑까지 이르렀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김해의 옛 성이 과연 언제 조성된 것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봉황대 주변이 낮은 습지였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밝혀졌고, 앞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주변까지 바닷물이 밀려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옛 성은 가락국 시대의 궁궐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외성이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2003년 발굴된 옛 가야의 성곽이 원래 가야왕궁이 있었다고 기록된 비석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가 있는 지역을 둘러싸고 축조되어 있다는 보고 또한 봉황동 유적은 가락국 귀족층의 주거지였으며, 여기에서 동쪽 지역이 김수로왕의 신답평 궁궐이었다는 생각을 더욱 굳게 한다. 이는 반월성을 중심으로 그 서남쪽 성 밖에 김유신의 집을 비롯한 귀족들의 집이 있었던 구조와 참으로 닮아 있다.
이로 볼 때 김수로왕의 신답평 궁궐은 봉황대의 동쪽이며, 북쪽으로는 임시 궁궐의 남쪽이며, 남쪽으로는 태풍이 세차게 불면 바닷물이 성 아래까지 이를 수 있는 곳의 북쪽이다. 이로 볼 때 가락국의 궁궐터는 동상동 시장 안에 있는 연화사(蓮華寺)의 비석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학규(1770~1835)는 다음과 같이 가락국의 옛 성을 노래하고 있다.
구지봉의 왕기 가을 기운에 차가운데 | 龜峯王氣冷秋煙 (구봉왕기냉추연) | |
<이학규, 金官紀俗詩(금관기속시)> |
시에는 '가락은 본디 수로의 나라 이름이다. 지금 부의 남쪽 10리 바닷가에 가락의 마을이 남아 있는데 수로가 흙을 쌓아 올려 이룬 성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은 언덕만큼 높다. 가래나 괭이가 쉽게 들어가지 않는다'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이학규가 보고 읊은 것이 분명히 김수로왕 시대의 토성(土城)이었는지, 봉황대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그곳을 김수로왕 시대의 그것으로 확신하고 있다는 것과, 구지봉에서 왕의 기운을 타고 나타난 김수로왕이 다스리던 옛 가락국은 사라졌어도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성곽을 쌓고 백성들을 위해 노력했던 김수로왕의 정신인 양 토성이 아직도 돌보다 단단히 남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다음으로는 조선조 말 허유(許愈 : 1833∼1904)가 봉황대를 읊은 시를 보자.
쇠망한 주나라 봉새는 어디서 노니나 | 衰周天地鳳何遊(쇠주천지봉하유) | |
<허유, 鳳凰臺(봉황대)> |
시 제목의 봉황대는 경주의 봉황대와 같다. 그러나 삼차나, 일곱 점 모래톱 등을 볼 때 여기에서의 봉황대는 김해의 것이 분명하다.
가락국은 사라지고 수로왕도 세월 속에 사라져 버렸다. 그가 이루었던 궁궐과 성곽들도 황폐해져버려 확인하기 어렵다. 이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하지 않을 자연만 남았다. 가락국의 영욕(榮辱)을 머금은 채 멀리 삼차강(三叉江)은 흐르고, 칠점산(七點山)은 아득히 아른거린다. 김수로왕이 이루어내었던 모든 것은 자연의 흐름 속에 묻혀버리고, 신선의 고향인 듯 아름다운 풍광만 남았다.
지금 봉황대에는 가락국 시대의 가옥, 창고, 배 등을 복원해 두었고, 꼭대기에는 가락국 천제단(駕洛國天祭壇) 등을 조성하여 두어, 가락국 시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가락국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으니, 이왕 봉황대를 찾은 참에 이를 듣고 가도록 하자.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