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20년(1744)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김해 명지도(鳴旨島)의 소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국가 재정에 활용하기 위해 창고를 설치하자고 건의했다. 산산창 설치 명분은 포항창(浦項倉) 곡식의 부족을 보충하는 한편 호서와 호남지방의 흉년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진휼청(賑恤廳) 당상(堂上)과 경상감사에게 사정을 살펴 절목을 만들게 했다. 경상감사는 현지민들과 접촉한 다음, 산산창 설치는 매우 좋은 계책이며, 명지도 백성들도 만약 한곳에다 소금을 전속시키면 세금으로 소금 천석을 자진해서 바치겠다고 한다는 보고를 했다. 명지도에 대한 궁방(宮房), 아문(衙門), 통영(統營) 등의 침탈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명지도 소금 생산 백성들 또한 첩징(疊徵)과 남징(濫徵)의 폐단을 제거해 줄 것을 바랐다.
이처럼 정부 재정에 명지도의 소금을 활용할 필요를 느꼈던 일부 관리들과 명지도 소금 생산 백성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영조 21년(1745) 산산창이 설치됐다. 그런데 산산창은 조선조 후기에 설치된 것이라, 이곳을 읊은 시의 내용은 창고로서의 산산창보다는 산산대 주변 포구가 품은 풍광의 아름다움에 집중돼 있다. 지금도 산산창이 있었던 대동면 예안리는, 뒤로는 백두산·마산(馬山) 등의 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서낙동강이 흘러내리는 절경을 이루고 있으니 그 옛날 한적하던 시절의 그곳이야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조선조 초기 시인 정사룡(鄭士龍:1491~1570)은 대동의 건너편이며 과거 양산에 속했던 부산시 북구 덕천동의 낙동강변인 축포(杻浦)에서 불암까지 배를 타고 가면서 네 수의 시를 읊었다. 여기에서는 산산 나루터와 불암 나루터에서 읊은 것을 보도록 하자.
산산 나루에 해질녘 배를 대고 | 蒜山渡口停橈晩(산산도구정요만) | |
<이학규, 주행 자강창포지명지도(舟行 自江倉浦至鳴旨島)> |
시인은 시의 말미에 '유하동(柳河東)의 별채다'라고 덧붙이고 있어 이 시는 당시 산산대 주변에 살고 있던 지인의 집에서 주변 풍광을 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휘도는 강물 끊어진 골짝 가로 펼쳐진 바다 | 江回峽斷海橫通(강회협단해횡통) | |
<정사룡, 자축포주행 저분성불암 잡기소력(自杻浦舟行 抵盆城佛巖 雜記所歷)> |
시인은 여기에도 '지주(地主)가 마중을 나왔다'라는 설명을 붙여 두었다. 이를 통해 당시 김해 부사가 직접 시인의 행차를 맞이하러 나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에서 볼 수 있듯 모든 공무(公務)를 잊고 음악과 시를 즐기던 당시의 풍경과,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떠나기 아쉬워하는 시인의 심경을 잘 읽을 수 있다. 다음은 당시 김해로 유배를 와 있던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시다.
문 밖에서 돛 거두고 가까이 배를 매니 | 聚帆門外近維舟(취범문외근유주) | |
<이학규, 산산대증최동지유회남우촌상사(蒜山臺贈崔同知有懷南雨村上舍)> |
시 제목에서 보듯 이 시는 산산대에서 진사(進士) 남우촌을 생각하며 읊은 것이다. 남우촌은 남상교(南尙敎:1783~1866)로 시인 이학규의 집안과 가까운 천주교도였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목사(牧使)·동지돈령 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글을 매우 잘 했다. 1866년(고종 3) 아들 남종삼(南鍾三)과 함께 공주영(公州營)에 투옥되었다가 사형당했다. 유배된 상황이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시인의 답답하고 시린 심경이 잔잔히 흐르는 찬 물결과 잘 어울려 있다.
다음은 조선조 중기의 시인인 조임도(趙任道:1585~1664)가 불암을 지나면서 읊은 시다.
남명의 높은 절개 높은 산 솟았고 | 南冥峻節高山聳(남명준절고산용) | |
<조임도, 분성불암노중(盆城佛巖路中)> |
조임도는 불암으로 가는 과정에서 김해를 대표하는 두 인물을 회상하고 있으니, 바로 김해에서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던 남명 조식(曺植)과 김해의 상징인 김수로왕이다. 김수로왕에 대해서는 이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고, 조식의 유적지인 산해정(山海亭)은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한다.
땅은 오래되어도 산하는 그대로이고 | 地古山河在(지고산하재) | |
<정희량, 등불암 이수(登佛巖 二首)> |
시인 정희량(鄭希良:1469~?)은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1500년 김해로 옮겼다. 뒤에 모친상을 지내다가 의복만 남기고 행방을 감추었다. 그는 유학뿐만 아니라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아 사실은 죽지 않고 이름만 바꾸어 숨어살았다는 설화가 많이 전한다. 이러한 그답게 시에서도 그는 불암의 뛰어난 풍광을 신선이 나타나는 곳으로 생각하면서 이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