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늘처럼 생겼다고 마늘산(산산:蒜山)이라 불렸으며, 마음산(馬飮山)이라고도 한다. 풍수지리설로 보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모양의 명당이 이곳에 있는데 누대로 만석군이 나올 자리라고 한다. 산산창은 마산의 사창(社倉) 터라 불린 곳에 있었다. 영조 21년(1775) 이곳에 산산창을 세워 명지도의 소금굽는 염간을 상대로 소금 2석을 쌀 1석과 교환해주고 그것을 저장했다. 사진에서는 비닐하우스 뒤편으로 보이는 건물 자리가 산산창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김해뉴스 DB
이제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낙동강의 출발점인 대동면 초정리에서 김해로 들어가는 주요 포구였던 불암(佛巖)으로 가보자. 대동은 조선 시대에 중앙 정부 및 각 지역으로 곡식 등 산물을 운송하던 조운(漕運)의 핵심 지역이었다. 따라서 김해에는 많은 창고들이 있었으니, 진휼창(賑恤倉)·설창(雪倉)·해창(海倉)·산창(山倉) 등이 그것이다. 특히 대동 포구 주변 산산대(蒜山臺)에는 산산창(蒜山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있으나, 이를 정리 발표한 이욱 선생의 논문(2003)을 보면 더욱 쉽고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영조 20년(1744)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김해 명지도(鳴旨島)의 소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국가 재정에 활용하기 위해 창고를 설치하자고 건의했다. 산산창 설치 명분은 포항창(浦項倉) 곡식의 부족을 보충하는 한편 호서와 호남지방의 흉년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진휼청(賑恤廳) 당상(堂上)과 경상감사에게 사정을 살펴 절목을 만들게 했다. 경상감사는 현지민들과 접촉한 다음, 산산창 설치는 매우 좋은 계책이며, 명지도 백성들도 만약 한곳에다 소금을 전속시키면 세금으로 소금 천석을 자진해서 바치겠다고 한다는 보고를 했다. 명지도에 대한 궁방(宮房), 아문(衙門), 통영(統營) 등의 침탈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명지도 소금 생산 백성들 또한 첩징(疊徵)과 남징(濫徵)의 폐단을 제거해 줄 것을 바랐다.
 
이처럼 정부 재정에 명지도의 소금을 활용할 필요를 느꼈던 일부 관리들과 명지도 소금 생산 백성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영조 21년(1745) 산산창이 설치됐다. 그런데 산산창은 조선조 후기에 설치된 것이라, 이곳을 읊은 시의 내용은 창고로서의 산산창보다는 산산대 주변 포구가 품은 풍광의 아름다움에 집중돼 있다. 지금도 산산창이 있었던 대동면 예안리는, 뒤로는 백두산·마산(馬山) 등의 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서낙동강이 흘러내리는 절경을 이루고 있으니 그 옛날 한적하던 시절의 그곳이야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조선조 초기 시인 정사룡(鄭士龍:1491~1570)은 대동의 건너편이며 과거 양산에 속했던 부산시 북구 덕천동의 낙동강변인 축포(杻浦)에서 불암까지 배를 타고 가면서 네 수의 시를 읊었다. 여기에서는 산산 나루터와 불암 나루터에서 읊은 것을 보도록 하자.
 

산산 나루에 해질녘 배를 대고
마음 받아 가벼운 수레로 부드러운 모랫길 걷네
빙 두른 길 아름다운 가로 그늘진 섬돌 굽었고
아름다운 난간 높이 솟아 바다와 하늘 아득하네
듣자하니 지을 때 마음을 수고롭게 했다 하는데
큰 집 아름다움 다투어 전하니 감탄을 일으키네
이리저리 서성이니 은은한 향기 옷소매 덮어오는데
반쯤 내린 발이 가을 대나무에 성긴 꽃을 감췄네
 

蒜山渡口停橈晩(산산도구정요만)
取意輕輿踏軟沙(취의경여답연사)
繚徑巧緣陰磴曲(요경교연음등곡)
雕欄高壓海天遐(조란고압해천하)
經營見說勞心匠(경영견설노심장)
輪奐爭傳起咄嗟(윤환쟁전기돌차)
徙倚幽香來拂袖(사의유향래불수)
半簾秋竹隱疏花(반렴추죽은소화)

   
<이학규, 주행 자강창포지명지도(舟行 自江倉浦至鳴旨島)>  


시인은 시의 말미에 '유하동(柳河東)의 별채다'라고 덧붙이고 있어 이 시는 당시 산산대 주변에 살고 있던 지인의 집에서 주변 풍광을 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휘도는 강물 끊어진 골짝 가로 펼쳐진 바다
사또께서 맞으러오니 음악 소리 웅장하네
바람 잠잠 돛대 깃발 서북으로 던져졌고
빛나는 기생 배 물 거슬러 오니 한 무리로다
고상한 이야기 참으로 왕가의 일에서 벗어났고
좋은 시구는 백수통에 전한다
맑은 흥 다 못하고 떠날 생각 드러내나니
길은 등귤이 향기로운 속으로 뜷려있구나 

江回峽斷海橫通(강회협단해횡통)
地主來迎鼓角雄(지주래영고각웅)
風約檣旗西北擲(풍약장기서북척)
光生妓舸泝洄同(광생기가소회동)
高談正脫王家塵(고담정탈왕가진)
佳句仍傳白守筒(가구잉전백수통)
淸興未闌挑去思(청흥미란도거사)
路穿橙橘噀香中(노천등귤손향중)

   
<정사룡, 자축포주행 저분성불암 잡기소력(自杻浦舟行 抵盆城佛巖 雜記所歷)>  

 
시인은 여기에도 '지주(地主)가 마중을 나왔다'라는 설명을 붙여 두었다. 이를 통해 당시 김해 부사가 직접 시인의 행차를 맞이하러 나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에서 볼 수 있듯 모든 공무(公務)를 잊고 음악과 시를 즐기던 당시의 풍경과,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떠나기 아쉬워하는 시인의 심경을 잘 읽을 수 있다. 다음은 당시 김해로 유배를 와 있던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시다.
 

문 밖에서 돛 거두고 가까이 배를 매니
한 조각 거친 산산대 나루터엔 달빛
빼어난 경치 우연히 부평초 되어
차가운 날에 또 산산에 노닐게 되었네
잔물결 움직임 없이 강 줄기는 넓고
흐릿한 숲 가없이 해 뿌리 거두어 들인다
고개 돌리니 고요한 언덕에 오랜 서재
닫힌 문 떨어지는 잎 참으로 시름 깊어라  

聚帆門外近維舟(취범문외근유주)
一片荒臺㬿渡頭(일편황대돈도두)
勝地偶成萍水合(승지우성평수합)
寒天又作蒜山遊(한천우작산산유)
漣漪不動江身闊(연의불동강신활)
煙樹無邊日腳收(연수무변일각수)
回首康厓老書屋(회수강애노서옥)
閉門黃葉正深愁(폐문황엽정심수)

   
<이학규, 산산대증최동지유회남우촌상사(蒜山臺贈崔同知有懷南雨村上舍)>  

 
시 제목에서 보듯 이 시는 산산대에서 진사(進士) 남우촌을 생각하며 읊은 것이다. 남우촌은 남상교(南尙敎:1783~1866)로 시인 이학규의 집안과 가까운 천주교도였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목사(牧使)·동지돈령 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글을 매우 잘 했다. 1866년(고종 3) 아들 남종삼(南鍾三)과 함께 공주영(公州營)에 투옥되었다가 사형당했다. 유배된 상황이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시인의 답답하고 시린 심경이 잔잔히 흐르는 찬 물결과 잘 어울려 있다.
 

▲ 불암동(佛巖洞)에 있던 미륵암 마애석불(彌勒庵磨崖石佛). 지금은 동상동(東上洞) 연화사(蓮華寺)에 있다. 많이 훼손된 모습이 안타깝다.
대동이 현재 김해의 동쪽 관문이라면 불암동은 중앙 관문이다. 불암동에는 배중개라는 자연부락이 있는데, 풍랑이 일거나 하면 배를 대기도 했던 개(浦)라고 한다. 현재는 서낙동강과 멀리 떨어져 산자락 아래에 위치한 배중개가 그러했다면 옛날 불암은 서낙동강과 동쪽의 대동, 남쪽의 죽도(竹島), 서쪽의 남포(南浦) 등과 더불어 김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포구였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불암에는 지명이 말해주듯 미륵암 마애석불(彌勒庵磨崖石佛)이 있었다. 현재는 남해고속도로 공사 때 파손되어 김해시 동상동의 불교 포교원인 연화사(蓮華寺) 내의 뒷마당으로 옮겨져 있다. 안면부가 파손되어 형태는 분명하지 않으나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진 모습이며, 눈은 반쯤 뜨고, 짧은 목에 삼도(三道:불상의 목에 가로로 표현된 세 줄기 주름)의 흔적이 있고, 통견(通肩:양 어깨를 모두 덮은 가사)의 선은 뚜렷하나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오른손은 노출되었으나 팔목 이하는 사라졌다. 두광(頭光: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을 새긴 선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다리 부분 아래로는 마멸되었다. 높이는 약 80㎝이며, 어깨넓이는 약 65㎝이다. 앞의 산산대를 읊은 시에서 시인들이 산산창보다는 그 주변 풍광에 시상을 집중하고 있듯, 불암을 읊은 시인들 역시 불암이라는 지명 또는 부처상에 대한 감흥보다는 그 주변 풍광에 시상을 집중하고 있다.
 
다음은 조선조 중기의 시인인 조임도(趙任道:1585~1664)가 불암을 지나면서 읊은 시다.


남명의 높은 절개 높은 산 솟았고
수로의 웅장한 기풍 큰 바다 깊어라
한필 말로 홀로 왔다 홀로 떠나가니
십분 흥취가 가슴에 가득하구나 

南冥峻節高山聳(남명준절고산용)
首露雄風大海深(수로웅풍대해심)
匹馬獨來還獨去(필마독래환독거)
十分佳趣滿胸衿(십분가취만흉금)

   
<조임도, 분성불암노중(盆城佛巖路中)>  

 
조임도는 불암으로 가는 과정에서 김해를 대표하는 두 인물을 회상하고 있으니, 바로 김해에서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던 남명 조식(曺植)과 김해의 상징인 김수로왕이다. 김수로왕에 대해서는 이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고, 조식의 유적지인 산해정(山海亭)은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한다.
 

▲ 1800년대 초 산산창(蒜山倉). 왼쪽으로 산해정(山海亭) 자리의 신산서원(新山書院)이 있고, 다시 왼쪽으로 보면 해창(海倉)이 있다. 그리고 아래에는 소금 생산지였던 명지도(鳴旨島)가 있다.
다음으로, 조선조 초기 시인 정희량은 불암에 올라 두 수의 시를 읊었는데, 이 가운데 당시 그곳의 풍광을 읊은 시를 보기로 하자.


땅은 오래되어도 산하는 그대로이고
숲 깊숙이 물총새가 운다
강이 휘돌고 하늘은 굽었고
들이 넓고 나무는 들쑥날쑥
돌과 모래 물가 파리하고
매화와 대숲 밖이 흐릿하구나
어정거리다 생학 지나는 걸 만났으니
여기에서 그윽히 살고 싶구나 

地古山河在(지고산하재)
林深翡翠啼(임심비취제)
江回天屈曲(강회천굴곡)
野廣樹高低(야광수고저)
石髪磯邊瘦(석발기변수)
梅花竹外迷(매화죽외미)
徜逢笙鶴過(상봉생학과)
玆境欲幽捿(자경욕유서)

   
<정희량, 등불암 이수(登佛巖 二首)>  

 
시인 정희량(鄭希良:1469~?)은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1500년 김해로 옮겼다. 뒤에 모친상을 지내다가 의복만 남기고 행방을 감추었다. 그는 유학뿐만 아니라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아 사실은 죽지 않고 이름만 바꾸어 숨어살았다는 설화가 많이 전한다. 이러한 그답게 시에서도 그는 불암의 뛰어난 풍광을 신선이 나타나는 곳으로 생각하면서 이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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