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따지고 할 것도 없이 재빨리 나오는 '할매 추어탕'의 추어탕. 메뉴가 한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오렌지색 지붕 이고 강변 사거리 모퉁이에
나지막히 앉은 '할매 추어탕'
메뉴라고 해봐야 한가지뿐인데
경상도식으로 끓여내 개운하고 칼칼한
맑은 국물 한 그릇에 숟가락이 쉴 틈 없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비결 대물려
오로지 맛에만 충실하니
강바람 쐬러 하구 풍경 구경왔다가도
어찌 그냥 가리오
"그래, 이맛이야!"

오래된 음식점의 입지는 때로 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이해하는 좋은 단서가 된다. 도심에서 외떨어져 있는데다 차량의 흐름조차 뜸한 부산 강서구 식만동의 '할매 추어탕'의 경우가 그렇다.
 
우선 법정동인 식만동을 포함하고 있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의 역사를 한번 살펴 보자. 가락의 역사는 서기 42년 수로왕이 가락국을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895년(고종32년) 관제 개혁으로 김해군이 설치되고, 1899년(광무3년) 가락면이 증설되면서 공식 지명으로 등장한다. 그러다 198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 김이 모락모락나는 할매 추어탕의 한숟깔이 맛깔스럽다.
김해군 가락면이 부산직할시 강서구에 편입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할매 추어탕'에서 시만교라는 짧은 다리 하나면 건너면 김해시 불암동 분도마을과 이어진다. 부산으로 편입된 지 20년이 넘었건만 이 동네 주민들의 정서는 여전히 김해에 가깝고, 생활권 역시 김해가 중심이다.
 
강원도 태백시에서 시작된 낙동강은 김해시 대동면에 이르러 낙동강과 서낙동강으로 분리된다. 많은 사람들이 부산 구포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본래 물줄기로 알고 있지만, 낙동강 하류의 본류는 서낙동강이었다. 일제시대 김해평야의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대규모 치수사업 과정에서 대동수문을 설치했고, 이때부터 강의 흐름이 구포·사상쪽으로 틀어졌다. 서낙동강의 서쪽으로는 드넓은 김해평야가 펼쳐진다. 강-하천-도랑이 자연스레 연결되니 예로부터 민물고기가 많이 잡혔다. 주변에 논이 많다 보니 그중에서도 미꾸라지가 특히 많았다. 이런 자연 환경 때문에 식만동 일대에는 추어탕 집들이 즐비했으며 지금까지도 대여섯 집이 성업 중이다.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로 41년째 대를 물려오고 있는 '할매 추어탕'의 존재는 그래서 고맙다. 남북으로는 신어천과 서낙동강이 경계를 이루고 동서로는 부산시와 김해시가 경계를 이룬다. 손님을 찾아 진즉에 장소를 옮겼더라면, 이 절묘한 경계가 만들어내는 스토리를 잃어버릴뻔 했기 때문이다. 사거리 모퉁이에 나지막이 앉은 집의 모양새 또한 옛 모습 그대로다. 강렬한 오렌지색 지붕이 조금 뜬금 없다 싶은데 나름 아픈 사연이 있다. 태풍 '매미'에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이 다 날아가는 바람에 지금의 모습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이 오렌지색이 어찌나 강렬한지 위성지도에서조차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메뉴라 해봐야 추어탕 한 가지밖에 없는 탓에 주문을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추어탕과 찬이 나온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논과 도랑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미꾸라지는 서민들에겐 기특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옛 문헌에서까지 그 효능을 확실히 뒷받침하고 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미꾸라지는 맛이 달며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어 비위를 보하고 설사를 멈추게 한다고 전한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본초강목>의 기록이 더 솔깃해 보인다. 배 속을 따뜻하게 덥히며 원기를 돋우고 술을 빨리 깨게 할 뿐 아니라 발기 불능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원기회복·숙취해소·정력보강. 현대인들이 음식에 바라는 3대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으니 먹을거리가 풍부한 지금까지도 추어탕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전국적으로 즐겨 먹던 음식이다보니 지역마다, 심지어는 집집마다 추어탕 끓이는 방식이 다르다. 크게 서울식, 강원도식, 전라도식, 경상도식으로 분류된다. 서울식은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고 사골과 양지머리로 낸 육수로 끓인다. 강원도식은 된장과 함께 고추장을 풀어서 묵직한 느낌이 난다. 전라도식은 된장과 함께 들깨를 듬뿍 넣어 걸쭉하고 구수한 맛이 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상도식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곱게 갈아 넣어 상대적으로 맑고 개운한 느낌이 든다.
 
'할매 추어탕'은 전형적인 경상도식이다. 미꾸라지를 푹 삶은 다음 소쿠리에 받쳐 으깨 뼈와 살을 분리한다. 뼈는 버리고 살로만 국을 끓인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지만 이 과정이야말로 개운하고 칼칼한 경상도식 추어탕 맛의 핵심이다. 배추속대, 숙주, 부추 등의 야채가 듬뿍 들어가니 달고 부드러운 맛까지 더해진다. 멀건 추어탕 위에는 푸른 방아잎이 넉넉히 얹어져 있다. 방아의 향을 즐기는 것 또한 경상도식 추어탕의 특징이다.
 
이집 추어탕의 또 하나의 특징은 솜털마냥 부드럽게 갈린 미꾸라지 살이 넉넉하다는 점이다. 미꾸라지가 헤엄치다 간 것 같은 여느 추어탕과는 달리,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탕 속으로 뛰어들어 분골쇄신한 형국이다.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쓴 데다 대물림된 손맛까지 더해지니 그 맛이 더할나위 없이 깊고 개운하다. 소문난 추어탕집이 많다지만 어디 내놔도 손색 없을 듯 싶다. 식성에 따라 산초, 마늘, 청양고추 등등의 얹으면 다양한 맛과
▲ 박상현 기자가 추어탕 삼매경에 빠졌다. "박정훈 기자, 이거 진짜 맛있다. 얼른 찍고 당신도 퍼뜩 한그릇 하소. ㅎㅎㅎ"
향을 즐길 수 있다. 게눈 감추듯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면, 몸속 깊은 곳에서 뜨끈한 기운이 올라 온다. 원기회복·숙취해소·정력보강 등의 효능은 각자의 몸 상태와 바람 따라 선택하기 나름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기대치는 충족된다.
 
찬의 종류는 많지 않지만 하나같이 촉촉하다. 연근조림은 속속들이 간이 배이고 식감이 살아 있다. 명태조림은 단맛을 줄이고 깊은 맛을 더했다. 멸치젖으로 담근 김치는 땟갈이 곱고 산초가 들어 카랑카랑한 맛을 낸다. 시원한 미역무침은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가짓수를 늘리기보다는 구성과 내용에 충실하려는 고집이 엿보인다. 젓가락이 절로 분주해지는 이유다.
 
미꾸라지를 추어(秋魚)라고 부르는 것은 겨울철 동면을 앞두고 살이 오르고 지방이 많아져 초가을부터 제맛이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산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양식마저도 중국산이 대부분이고, 중국산 치어를 가져다 3개월만 키우면 국산으로 둔값하는 상황에서 '추어'는 그저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추어탕 한 그릇을 먹다가도 지천으로 널렸던 미꾸라지조차 살 수 없게 된 하천과 논바닥을 생각하면, 문득 서글픈 생각이 몰려 온다.
 
서글픈 건 미꾸라지뿐만이 아니다. '할매 추어탕'은 추어탕 만큼이나 붕어조림이 유명했다. 이집 붕어조림 맛에 반한 오랜 단골들은 염치도 없이 몇 접시씩 비우는 게 예사였다. 붕어조림이 구색을 갖추게 된 사연은 이렇다. 인근에 있는 선암(仙岩)마을은 과거 서낙동강의 황금어장으로 유명했다. 강에 그물을 던지면 장어, 메기, 가물치를 비롯해 붕어가 가득 달려 나왔다. 그물코에 대한 규정이 없던 시절이니 크기에 상관없이 잡았다. 씨알이 굵은 붕어는 붕어찜집으로 갔으나 새끼 붕어들은 미꾸라지와 함께 추어탕 집으로 딸려왔다. 아까운 생물을 버릴 수 없어 생각해낸 것이 조림이다. 무와 함께 오래 졸여낸 붕어조림은 밥 반찬으로 술 안주로 인기가 많았다. 허나 붕어가 사라지니 붕어조림도 자취를 감추었다.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등으로 대체되었다가 지금은 명태조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밥상의 변화는 환경의 변화를 대변한다. 자연산 미꾸라지와 붕어가
▲ 추어탕집 앞으로 보이는 시원한 하천으로 산책이나 가시게.
사라진 밥상을 대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친환경론자가 된다. 그래서 때때로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과 즐거움이라는 속성과 더불어 가장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식재료와 환경은 변했으나 41년을 이어온 내림 손맛은 여전한 탓에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예전 어르신들은 보양식을 권하며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거 한 그릇 먹고 나면 눈 뜨는 게 한층 개운해질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할매 추어탕'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그 맑은 기운으로 잠시나마 여유를 가지고 주변 산책을 해보는건 어떨까? 강바람은 여전히 개운하고 하구 풍경은 사뭇 서정적이다.

▶주소 : 부산광역시 강서구 식만동 16번지
▶연락처 : 051-971-7139
▶영업시간 : 오전 11시 ~ 오후 8시 (연중무휴)





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