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1명 이주해 현재 93명 거주
수남초에서 매주 수요일 한국어 공부
밴드 결성해 공연·환경봉사 등 큰 보람

지난 8일 김해에 첫 눈이 내렸다.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던 어린이들만큼이나 눈 소식이 반가운 사람들이 있었다. 장유 율하동에 살고 있는 사할린 동포들. 김영생(71) 씨는 "오랜만에 눈이 많이 내려서 기분이 좋다. 사람 키만큼 눈이 쌓이던 사할린 생각이 많이 난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할아버지, 할머니와 다를 바 없지만, 김 씨가 나고 자란 곳은 러시아 사할린이다. 러시아에서 평생을 산만큼 아침에는 커피와 빵, 치즈를 먹는다. 뜨끈한 온돌을 사용하는 좌식 생활보다 침대를 쓰는 입식 생활에 더 익숙하다. 

▲ 최종식(왼쪽) 씨와 박민수 씨가 율현마을 주공12단지 사할린경로당에서 체스를 두고 있다.

이들은 부모가 일제강점기 때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후 사할린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고국을 그리워하던 부모들은 대부분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도 나이가 60~70대에 이르는 노인들이다. 이렇게 국내로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는 전국적으로 4천여 명에 이른다. 김해에는 2009년 101명이 귀국했다. 지난 5년간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지금은 93명이 율현마을 주공12단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파트 내 사할린경로당에서 김영생, 최종식(71), 박민수(69) 씨를 만났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사할린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하자, 최 씨는 잠깐 추억을 더듬는 듯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사할린은 겨울이 되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요. 추운 건 말도 못하죠. TV에 나오는 러시아인들처럼 털모자에 털 귀마개를 하고 다녔죠. 10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인데, 눈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어요."

옆에 있던 김 씨도 말을 거들었다. "눈이 집을 다 덮을 정도예요. 그래서 러시아 집의 문은 밖으로 밀어서 여는 방식이 아니라 안으로 당겨서 여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어요. 그래야 집 밖에 나갈 수 있으니까요. 학교에는 스키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갔어요. 눈사람도 만들고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죠." 

한국에 온 지 5년밖에 안됐다는데도 한국어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강원도, 북한 말투가 섞인 것 같았다. 사할린에서 조선학교에 다니며 한글을 배울 때 북한에서 공수해온 교과서를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세대는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어,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러시아어를 배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얼어붙을 듯 추운 사할린에서 부모들은 탄광에서 일하고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자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공부를 시켰다. 가난할수록, 배고프고 어려울수록 더 배우고 배워야 한다는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기인한 것이었다.

박 씨는 "조선학교에는 1~10학년이 있었다. 졸업 후에는 다 러시아학교에 들어갔다. 1964년에는 조선학교가 완전히 없어졌다. 동포들은 모두 러시아학교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힘든 시절에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대학까지 다녔다"며 아련한 옛날을 추억했다. 그는 공업대학을 나와 건축설계 일을 했다. 김 씨는 의대를 나와 신경과 의사로 활동했다.

1990년대부터 사할린 동포들을 위한 영주 귀국길이 열렸다. 부모들에게 듣기만 했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한국에 간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최 씨는 "일본과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한국에 3차례 정도 여행을 왔었다. 어머니가 말했던 조국의 따뜻한 날씨, 발전된 모습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고 한국에서 남은 생애를 살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김해는 부모가 들려준 이야기 속 김해와 많이 달랐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김 씨는 "어머니가 참외와 감이 먹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김해에 와서야 비로소 어머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맛을 보게 됐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은 김해 특산물인 칠산 참외와 진영 단감인 것 같다"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 러시아보다 부모의 고향인 한국이 훨씬 살기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에 두고 온 자식들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인터넷 화상채팅을 이용해 자식과 손자들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거나,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한다. 한국에 잘 적응해 살고 있는 부모의 모습에 자식들도 만족해 한다고 한다. 한국에 제대로 적응하기 위한 동포들의 노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이면 아파트단지 바로 앞에 있는 수남초등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목요일에는 하모니카를 배운다. 러시아어로 '좋다'는 뜻인 '하라쇼'밴드를 만들어 지역 행사 때 하모니카 공연을 펼치기도 하고, 지역의 환경봉사 활동에도 참여한다. 지난 10월에는 아파트 벼룩시장에서 전을 부쳐 아파트단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세월호 사고 직후에는 조금씩 돈을 모아 51만 5천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최 씨는 "낯선 땅에 정착하기까지 도와주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매번 그렇게 도움을 받기만 했다. 작은 것들이지만 받은 걸 돌려줄 수 있어서 참 기뻤다. 앞으로도 이웃들과 함께 서로 돕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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