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귀: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

방물장수 꼬임에 넘어간 섭개 부자
솔맡 어여쁜 과수댁 집 드나들어
안채 마누라 "귀신은 뭐하는고…"

영감 뒤쫓던 길 소복 여인 나타나
소원 말하며 "딴살림 막아주겠다"
귀신과 하룻밤 지낸 부자 혼비백산

옛날에 김해 섭개(성포마을)에 한 부자가 있었다. 곳간은 넉넉하고 자식도 아들 딸을 잘 두었다. 부자는 세상에 걱정이 없었고, 걱정이 없으니 심심했다.
 
"오늘은 또 뭘 하며 하루를 보내나?"
 
사랑채에 앉아서 담뱃대를 톡톡 두드리며 하품을 하고 있는 부자를 방물장수가 지나가다 보았다. 방물장수는 물건을 팔러 온 척 하며 부자에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이웃마을 솔맡(송촌마을)에 어여쁜 과수댁이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것이오?"
 
과수댁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지만 부자는 시치미를 뚝 뗐다. 방물장수가 말했다.
 
"도랑도 치고 가재도 잡는거요. 행하(行下)만 넉넉히 준다면 내 당장 가서 말을 넣어 드리지요."
 
부자는 못 이기는 척 방물장수에게 행하를 집어주었다. 방물장수는 신이 나서 당장 이웃마을 과수댁에게 달려갔다.
 
"부자 양반과 왔다갔다하면서 지내면 외롭지도 않고 좋지 않겠어? 그 양반이 살림도 넉넉하게 보태줄 테고 말이야."
 
혼자 사는 게 외롭고 힘들었던 과수댁은 방물장수의 말에 금방 넘어갔다. 그래서 일을 성사시켜주는 조건으로 방물장수의 물건을 왕창 팔아주었다. 
 
그렇게 해서 부자는 과수댁을 작은집으로 정해 놓고 들락거리게 되었다. 섭개에서 솔맡으로 가자면 사깍창모랭이라는 산모퉁이를 지나야 했다. 사깍창모랭이는 섭개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함박산이 들판을 향해 내려오다 멈춘 지점에 있었다. 섭개에서 솔맡까지는 남정네 빠른 걸음으로 사깍창모랭이를 돌아 한식경 거리였다. 부자는 방물장수의 전갈을 받은 날 저녁 당장에 솔맡으로 가서 과수댁을 만났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자기 집 사랑채로 돌아왔다. 
 
아무도 몰래 과수댁을 만나고 온 부자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낮 내내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저녁을 먹자마자 얼른 사랑채로 가서 안으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가 부리나케 과수댁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과수댁과 재미있게 지내다가 새벽에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부자는 사흘이 멀다 하고 섭개와 솔맡을 오갔다.
 
심심하던 세상이 그렇게 재미날 수 없었다. 과수댁 생각만 하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혹시라도 안채 마누라가 눈치를 챌까 하여 몹시 조심했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허겁지겁 솔맡으로 가니 과수댁이 몹시 반기며 물었다.
 
"영감님. 사깍창모랭이 돌아올 때 무섭지 않으셨나요? 제가 듣기로는 백여우가 여자로 둔갑해서 나타나서는 사람을 홀려 간을 빼먹는다고 하던데요."
 
부자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런 소리는 나도 수없이 들었다네. 사깍창모랭이에는 백여우만 나오는 게 아니라 살쾡이며 호랑이에, 도깨비까지 나온다고 말이야. 모랭이가 깊고 으슥하니 공연한 소리들을 하는 게지."
 
부자의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섭개에서 솔맡으로 가는 모랭이는 오래 전부터 온갖 귀신들이 다 나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귀신이며 요물들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고 으슥한 곳에 있다고 믿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모랭이는 밤이 되면 인적이 끊기기 마련이었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온갖 귀신들은 모두 그곳에 살고 있었다.
 
"허허. 나는 간담이 커서 아무 것도 무섭지 않으니 걱정 말게. 내 어릴 때부터 온갖 귀신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이제까지 한번도 귀신을 만난 적이 없다네."
 
과수댁에게 부자는 큰소리를 쳤다. 실제로도 부자는 간담이 컸다. 총각 때는 비 오는 날 공동묘지에 다녀오면 술 한 말을 준다는 내기를 해서 여러 번 이긴 적도 있었다. 부자는 귀신이란 심신이 허약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헛것이라 여겼다. 
 
"정말입니까? 솔직히 저는 영감님이 안 오시는 날에는 걱정이 된답니다. 사깍창모랭이 지나 오시다가 백여우한테 홀려서 저 같은 건 잊어버리신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과수댁이 아양을 떨었다.
 
"허허. 사깍창모랭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 마누라라네. 그 할망구가 우리 사이를 알게 되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네."
 
부자와 과수댁은 둘의 관계가 소문이 나거나 부자의 마누라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방물장수에게 자주 행하를 주었다. 방물장수는 신이 나서 부자와 과수댁 사이를 오갔다.
 
그러기를 무려 두 해. 어느 날 사랑채에 들러 과수댁의 말심부름을 하고 가던 방물장수를 부자 마누라가 안채로 불러들였다.
 
"사랑채에서 필요한 게 뭐가 있다고 드나드는 것이야?"
 
마누라는 방물장수를 몹시 다그쳤다. 
 
"그동안 살림이 야금야금 축나고 있어서 내 살피고 있었지. 설마 자네한테 물건을 산다고 그 많은 돈을 썼을 리는 없고, 아무리 마누라가 싫증이 났다 해도 자네 같은 할망구에게 빠졌을 리는 더욱 없고…. 내 나이가 예순이 넘었으니 영감이 두 집 살림을 하건 세 집 살림을 하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재산이 축나는 건 절대 참을 수 없다네. 사실대로 말해주면 영감이 축내고 있는 재산의 절반을 자네한테 주겠네."
 
마누라의 말에 혹해서 방물장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술술 불어 버렸다. 그리고는 대단한 공이라도 세운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마누라는 하인을 불러 방물장수에게 매질을 한 다음 다시는 마을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멀리 쫓아버렸다.
 
"그동안 재미를 보셨다 이거지? 내 이 영감을 그냥…."
 
마누라는 울화를 참을 수 없었다. 당장 과수댁을 찾아가 살림을 박살내고 머리채를 쥐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화풀이를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자기가 망신을 당할 게 뻔했다. 안채 마누라는 어떻게 하면 과수댁과 영감을 떼어놓을 수 있을지 궁리했다.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채로 날이 저물었다. 마누라는 저녁을 먹고 사랑채로 가는 영감 뒤를 따라갔다. 영감은 사랑채에 들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마누라는 곧 방물장수가 일러준 뒷문에 가서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영감이 뒷문을 열고 나오더니 휭하니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홧김에 영감의 뒤를 쫓아가던 마누라는 사깍창모랭이에 이르러서 그만 힘에 부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마누라가 쫓아오는 줄도 모르고 영감은 산모퉁이를 돌아서 가버렸다.
 
"아이고 원통해라. 꽃 같은 나이에 시집 와서 아들 낳아주고 딸 낳아주고, 소처럼 일하고 정승처럼 공경했건만 이제 와서 딴살림이 웬말인고. 아이고 원통해라. 세상에 귀신이 많다더니 다 뭐하는고. 저런 인간 안 잡아가고."
 

▲ 그림=정원조 화가.

마누라는 영감이 사라져버린 사깍창모랭이를 쳐다보며 통곡했다. 그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소복을 입고 머리를 곱게 빗은 여인이 나타났다. 깜짝 놀라는 마누라에게 소복 여인이 말했다.
 
"제사 한번만 지내주면 내가 잡아갈게."
 
마누라가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자 소복 여인이 말했다.
 
"내 남편도 바람이 나서 딴살림을 차렸지. 그래서 나는 목을 매어 죽었어. 아무도 내 제사를 안 지내주니까 이렇게 떠돌이귀신이 됐지 뭐야. 제사 한번만 지내주면 나는 저승길로 가서 좋고 할멈은 소원 풀어서 좋지."
 
마누라는 그제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귀신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밉다 해도 평생을 함께 살아온 영감을 귀신에게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줄 테니 영감을 저승으로 데려가지는 말고, 딴살림을 못 차리게만 해 달라고 했다.
 
"좋아. 그렇게 해주지."
 
소복 여인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마누라는 비로소 몸이 덜덜 떨렸다. 말로만 듣던 귀신을 만났고, 귀신과 약속까지 해버렸으니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누라는 엉금엉금 기다시피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마누라는 부지런히 제사 준비를 했다. 해가 기웃해지자 마누라는 준비한 제사 음식을 들고 사깍창모랭이로 향했다. 어디서 제사를 지내야 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까, 하얀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서 깔쭉거리는 것이 꼭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마누라는 토끼를 따라갔다. 산비탈을 잠시 올라가던 토끼가 멈춘 곳에는 평평한 무덤이 있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풀이 우거져 있었지만, 분명히 무덤이었다.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한편 부자는 과수댁 생각에 마누라가 안 보이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리나케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즈음 제사를 다 지내고 돌아온 마누라는 사랑채에 영감이 없는 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흥. 어디 두고 봐라. 다시는 그 년을 못 볼 것이니."
 
그때 부자는 사깍창모랭이에 도착해 솔맡을 향해 열심히 걷고 있었다. 보름을 앞둔 달은 휘영청 밝았고, 곧 만나게 될 과수댁을 생각하니 걸음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그런데 산모퉁이를 절반이나 돌았을까. 여남은 걸음 앞에 웬 여인이 나붓나붓 걸어가고 있었다. 곱게 빗은 머리에는 비녀를 질렀고, 달빛에 하얀 치마저고리가 은은하게 빛났다. 부자는 눈을 한번 씻고 앞서 걸어가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앞으로 약간 숙인 채 걷고 있는 여인의 허리는 잘록했고, 엉덩이는 도톰했다.
 
부자는 침을 꼴깍 삼켰다. 호젓한 곳에서 어여쁜 여인을 만나니 솔맡 과수댁도 깜빡 잊어버렸다. 부자는 여인을 따라잡으려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여인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부자는 제 걸음이 너무 느린 줄 알고 더 빨리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걸어도 소용이 없었다. 여인은 딱 여남은 걸음 앞에서 여전히 나붓나붓 걷고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기도 하고 또 애가 타기도 해서 부자는 소리쳐서 여인을 불렀다.
 
"여, 여보시오. 거 참, 같이 좀 갑시다."
 
부자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여인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부자를 향해 손짓을 했다. 부자는 여인을 따라갔다. 달빛이 환한 길을 가니 아담한 집이 있었고, 불이 켜져 있었다. 부자는 아리따운 여인이 이끄는대로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인과 재미나게 놀다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잠이 깬 부자는 산속 평평한 무덤 위에 발가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어여쁜 여인과 꿈같은 하룻밤을 지낸 줄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부자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는 혼비백산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과수댁에게 가지 않았다고 한다.

 



김해뉴스

조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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