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때 김해읍성 4대문을 끝까지 지킨 네분의 충신을 모신 사충단. 김병찬 기자 kbc@
왕조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 비록 나라는 멸망했으나 가야의 문화는 계속 전승돼 왔다. 통일신라의 작은 수도가 되기도 했으며, 고려시대에는 대도호부가 설치돼 지금의 통합창원시 일원 전체를 관할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낙동강 서안에 해당하는 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일원 전체가 김해의 행정구역이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문화재로는 사충단(기념물 제99호)과 선조국문교서(보물 제951호), 선조어서각(문화재자료 제30호) 등 충효 관련 유적과 각종 교육 관련 문화재가 있으며, 당시 주민들의 삶의 흔적을 알려주는 능동 석인 및 상석(유형문화재 제71호), 시례리 염수당(문화재자료 제402호), 장방리 갈대집(문화재자료 제421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가야고도 김해에서 가야시대 문화재보다 더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조선시대 문화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불교문화재와 교육 관련 문화재다. 현재 내외동 일대가 한강이남에서 학원이 가장 밀집한 곳이라는 통계자료가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유학의 본고장은 아니지만 지금의 공립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관학교육기관인 향교(유형문화재 제217호)와 사립기관인 신산서원(산해정·문화재자료 제125호), 미양서원(서강 김계금 일고책판·유형문화재 제352호), 월봉서원(문화재자료 제464호) 등의 서원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사충단(四忠壇)은 임진왜란 때 김해부사가 달아난 뒤에도 끝까지 김해읍성의 4대문을 지키다 전사한 네 분의 충신(송빈, 이대형, 김득기, 유식)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묘단으로 원래는 동상동 김해 객사후원지 인근에 있던 것을 1977년 옮긴 것이다. 김해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가장 먼저 진입한 곳 중의 하나이므로 가히 의병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흔히 임진왜란 때 의병운동의 뿌리를 남명학으로 꼽는데,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적 근본이 김해에서 이루어졌음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조식 선생은 합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생활하다 32세인 1532년경 처가가 있는 김해로 내려와 산해정(山海亭)을 창건하고 이후 부인 조 씨가 죽은 1568년까지 30여 년 간 머물렀다. 1588년 산해정 동쪽에 신산서원이 창건됐다가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탔다. 이후 복원과 훼철을 거쳐 1890년 산해정이 중건 복원되었으며, 1998년 신산서원도 복원되면서 산해정이 서원의 강당으로 됐다.
 
선조국문교서는 임진왜란 때 강제로 부역하다 왜군을 따라 퇴각한 백성들과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선조 임금이 내린 한글로 된 문서인데,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했던 전쟁 중의 이적행위 등을 모두 용서하니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라는 임금의 약속을 담고 있다. 혹시 백성들이 어려운 한자를 못 알아볼까봐 한글로 작성되었는데, 체면보다는 백성들의 고난을 먼저 생각했던 선조 임금의 고심이 엿보인다.
 
김해향교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던 강당인 명륜당과 기숙사 건물이 앞쪽에 배치돼 있고 유학의 성현 중 공자를 비롯한 중국 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을 모신 동·서묘로 구성된 사당 공간이 후면에 배치된 구조이다. 그런데 현재 선현들의 위패는 편의상 모두 대성전에 모시고 있다. 대성동이라는 법정 지명이 향교의 이 대성전에서 비롯되었을 만큼 일종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서강 김계금 선생의 책판을 보관 중인 미양서원은 근래에 새로 신축한 까닭으로 목판만 문화재로 지정됐다. 향교 옆에 있는 허성재 선생 철명편 목판(문화재자료 제174호)을 보관중인 취정재도 마찬가지다.
 

▲ 월봉서원. 문화재자료 제469호(왼쪽) 장방리 갈대집. 문화재자료 제421호(오른쪽)

이와는 달리 월봉서원은 건물과 보관 중인 고문서(문화재자료 제469호) 등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데, 향교와 신산서원을 비롯한 다른 교육시설이 사실상 그 역할과 명맥이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늦게 건립된 월봉서원만 현재까지도 오히려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현재 주변에 있는 일신재와 화산재 등도 문화재로 지정 심사 중으로 이 일대를 묶어 일종의 선비마을로 조성할 경우 신도시화돼 옛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장유의 유일한 전통마을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진례에 있는 순흥 안씨 종가집인 염수당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소유자가 적극적으로 문화재 지정을 요구한 곳인데, 몇 대를 걸쳐 유지해 온 유산을 후손들이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김해는 물론, 두말이 필요없는 가야의 고도이다. 그러나 김해의 문화는 가야문화가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조선시대까지도 가야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많은 노력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곳곳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야문화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의 당위성이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