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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정취 간직한 도심 속 자연마을, 향기 그대로 간직하다(10) 내덕동 외덕마을
  • 수정 2017.09.27 10:58
  • 게재 2017.09.20 10:28
  • 호수 340
  • 13면
  • 이경민 기자(min@gimhaenews.co.kr)
▲ 마을회관 옥상에서 내려다 본 외덕마을. 마을 뒤로 ‘부산 부전-창원 마산을 잇는 경전철 공사’가 한창이다.

 

현재와 과거 혼재한 도심형 자연마을로 거듭나
서로간 믿음 속에 마을 전체 함께 옮겨
마을 곳곳에 옛 흔적 그대로 남아 있어

1600명 마을주민 대부분 50대 이상 1/3 농사 종사

‘고랑이’ ‘날가지’ 지명, 산과 물이 어우러진 마을
마을 뒤 신도시 조성, 지대 낮아 침수 걱정도



"이런 동네는 전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이가 좋았던 우리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가 싫어 다함께 마을 전체를 옮겨 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외동사거리에서 장유방면을 향해 달리다 보면 무계지하도가 나타난다. 지하도 입구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1-2층짜리 새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건물 사이 골목으로 들어서니 잘 정비된 주택과 빌라들이 즐비하다. 골목은 누군가 자를 대고 그은 듯 반듯하다.

과거 이곳에는 자연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외덕마을'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장유 지구 도시개발 사업에 마을이 편입되기 전까지 말이다. 당시 이 마을 바위공원 인근에 모여 살던 총 65가구 주민들은 각자 어딘가로 흩어져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서로 헤어지기가 싫어 망설였다. 결국 1997년 주민들은 공동으로 부지를 매입해 내덕중학교 맞은편으로 이주했다. 이주 전 마을과 이주 후 마을은 걸어서 5분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현재 마을회관은 마을 앞쪽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지상 2층짜리 깨끗한 벽돌건물이다. 지은 지 20년이 지난 건물이지만 비교적 관리가 잘 돼있었다. 외덕마을 김준섭(64) 이장은 마을 뒤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김 이장은 회관에 들어서며 먼저 앞마당에 있는 마을회관 준공기념비부터 보여줬다.

 

▲ 1997년 마을이 이주해오면서 함께 세워진 외덕마을회관(왼쪽)과 현재의 용봉재 모습.


그는 "네모반듯한 농지를 공동부지로 매입했기 때문에 마을이 가로 210m, 세로 100m 가량의 직사각형 모양이다. 도로부지를 포함하면 2만 2000㎡(6700평)에 달한다. 늪지대여서 물이 많아 3m 높이로 매립을 하고 땅을 분배한 후 각 부지에 번호를 달아 일명 '제비뽑기'를 했다. 위치선정에 공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부지크기는 각자 형편에 맞게 나누었고 이후 주택은 각자 지었다. 1997년 12월 대부분의 가옥과 마을회관이 완공됐다"고 설명했다.

마을회관 준공기념비 옆에는 상수도기념비가 함께 서 있다. 이장은 "이주 전 마을에 3~4개의 우물이 있었다. 바위공원 인근에 김씨 문중 재실인 용봉재가 있는데 그 앞에 당산나무와 우물이 존재했다. 그러다 약 40년 전 쯤 바위산 중턱에 물탱크를 설치했고 마을 전체 가구가 물을 편하게 쓸 수 있게 됐다. 이주해오면서 그때 세운 상수도 기념비도 옮겨왔다"며 웃었다.

 

▲ 외덕마을 출신 독립운동가 김승태 선생의 기념비.

이주 후 외덕마을은 세대수가 급격히 증가했고 하나였던 외덕마을은 2009년 2구, 올해 3구로 나뉘게 됐다. 1구는 이주마을, 2구는 바위공원 인근, 3구는 1구 도로 맞은편에 위치한다. 현재 1구 170여 세대, 2구 400여 세대, 3구 230여 세대로 전체 약 800세대, 16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은 50대 이상이며 마을인구의 1/3이 농사를 짓는다.

외덕마을은 조선후기에 편찬된 마을의 기록서 <호구총수>에 처음 등장한다. 약 4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이장은 "면사무소가 소장하고 있는 옛 책자를 보니 영조 35년(1759년)에 외덕마을이 형성이 됐다고 하더라. 지금 무계지하도 입구가 옛 마을의 입구였다. '고개 만디'로 불렸는데 경상도 사투리로 고개 꼭대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릴 때는 그 고개를 넘어가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이 있어 다른 길로 빙 둘러 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마을 뒤쪽 바위산 물이 마을 중간으로 흘러 '고랑이', 마을 끝은 '날가지'라고 불린 지명 유래도 있다.
 

외덕마을은 내덕동에 속해있다. 내덕동 인근에 무계동이 있는데 1919년 4월 12일 이곳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외덕마을 출신인 김승태 선생은 이 때 시위를 주동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선생은 투석과 몽둥이로 헌병주재소를 부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6월 5일 그는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아들이 옥고를 치루는 동안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마음을 담은 글을 가사형태로 썼는데, 어머니의 성씨를 따 '함안 조씨 내방가사'로 불린다. 글에는 나라를 잃은 탓에 아들이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것을 슬퍼하는 마음, 국권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등이 담겨있다.

1990년 정부에서는 김승태 선생의 공훈을 기리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를 기리는 기념비도 설치 됐는데 지금은 봉황동 김해시노인복지회관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또 선생의 어머니가 쓴 함안 조씨 내방가사는 송은복 김해시장 시절 선생의 손자가 시에 기증했다.

 

▲ 이주 전 마을 전경. 중앙에 김해 김 씨 재실 '용봉재'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마을 뒤에는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김 이장은 "부산 부전-창원 마산을 잇는 경전철이 서는 장유역이 들어선다. 국고보조 230억이 투입돼 2020년 6월 완공예정이다. 마을이 좀 더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하지만 사실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다. 주변에 비해 마을의 지대가 낮다. 1m를 더 매립하면 신도시 도로와 높이가 비슷해지는데 이주당시 경비가 부담이 돼서 이렇게 밖에 쌓지 못했다. 시에서는 마을에 펌프장을 만드는 등 대안을 마련해 줬다. 그러나 아직 마을에 큰 비가 내린 적이 없어서, 앞으로 많은 비가 내리면 어떻게 될지 제법 걱정이 된다"고 덧붙였다.

김해뉴스 /이경민 기자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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