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쉽게 찾아가는 문화유산
100년간 이어온 '가문의 서찰'… 예복에 향 피워 꺼내본 '스승 초상'김해의 문화재 (16) 월봉서원(月峯書院 ) ②
  • 수정 2017.11.15 10:57
  • 게재 2017.11.15 09:44
  • 호수 347
  • 10면
  • 조나리 기자(nari@gimhaenews.co.kr)
▲ 이보림의 손자인 이준규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가 연강재에 보관된 고문서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월봉서원 연강재에 소중히 보관된 보물
이보림 등이 엮은 '고문서'와 전우 초상화

<월헌가서찰> <대학강의> <화양유기> 등
학문 향한 월헌의 뜨거운 열정 엿보여

'신필' 채용신이 그린 간재의 상복 그림
망국 실의에 빠진 유학자 모습 잘 표현




올해로 세워진 지 100년이 된 월봉서원에는 집의 역사만큼이나 소중한 보물이 숨어 있다. 바로 월봉서원 고문서와 간재 전우(1841~1922) 초상화다.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469호, 유형문화재 제540호로 각각 지정됐다.

현재 연강재(蓮岡齋)에 보관돼 있는 고문서는 영남의 이름난 유학자였던 월헌 이보림(1903~1972)의 스승인 전우의 유묵에서부터 전우의 친필 원고 등을 묶은 필첩, 이보림이 전우의 제자들과 주고 받은 서찰 등 수십 권, 수백 장의 자료로 이뤄져 있다.

낱장 서간, 시문, 원고 등 252건을 묶은 <월헌가서찰>은 이보림의 조부인 농은 이경현(1859~1936)과 부친인 봉정 이승기(1885~1945), 아들인 화재 이우섭까지 4대가 일제 강점기였던 1918년부터 뉴밀레니엄인 2007년까지 근·현대 90년 동안 여러 인사들과 주고 받은 서간 등으로 이뤄져 있다. <월헌가서찰>을 보면 이보림의 집안이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 일원에 국한되지 않고 호남, 호서, 함경도, 제주도, 경기도, 서울 등에 거주하는 전우 문하 인사들과 노론 인사들 등 전국적인 명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보림의 손자인 부산대 한문학과 이준규 교수는 "19세기 문서가 문화재로 등록된 경우는 있지만 2000년대 문서가 문화재로 등록된 경우는 거의 없다.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가문의 서찰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깊다"고 설명했다.

고문서 중 <대학강의>와 <논어강의>를 살펴보면 젊은 시절 이보림의 학습 방법과 학술적 성취를 알 수 있다. 두 책은 이보림이 <대학>과 <논어>를 읽으면서 의문이 드는 점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 내용을 혁재 서진영(1886~1929)에게 물어 받은 답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돼 있다.

서진영은 전우의 제자다. 이보림은 1922년 전우가 별세하자 서진영을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당시 이보림의 나이 23세, 서진영의 나이 40세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7세였다. 당시에는 아버지와 아들 뻘이었지만,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처럼 때로는 동등한 학자의 위치에서 문답을 주고 받았다.

"을축년 겨울, 나는 부친의 명을 받들어 호남 시산의 진계에서 혁재 선생을 따라 배웠다. 바야흐로 대학을 배웠다. 선생이 명하시길 '무릇 배우는 일은 궁리를 귀하게 여긴다. 궁리하면 의문이 생길 터, 의문스러운 점을 기록하는 법이다. 이러기를 오래 하면 지금 당장 이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훗날 진보할 것을 증험하리라'라고 했다."

이보림은 <대학강의>에 덧붙인 서문에서 의문이 드는 점을 기록한 뒤 서진영을 찾아가 답을 얻었다. 이보림의 질문 중에는 "정자는 <대학>을 '초학'이 공부하는 책이라고 했고, 주자는 '대인'이 공부하는 책이라고 했다. 두 학설이 서로 반대되는 듯하다"는 등 주자와 정자의 견해가 다를 경우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묻는 것도 있다.

▲ 이보림의 시, 문, 서간, 일기 등을 묶은 <월헌집> 초고본.

이보림은 질의를 주고 받으면서 펴낸 <대학강의>를 부모에게 보여 칭찬을 받았다. 다음해에는 <대학>을 공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논어>를 공부하고 답을 달아 <논어강의>를 펴냈다. <논의강의>에 "내가 일찍이 이 장을 읽었을 때 의문이 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기록한 부분은 학문을 향한 이보림의 열의를 엿볼 수 있다. <논어> 역시 공자가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이므로 <논어강의>는 공자와 제자들이 거쳤던 배움의 과정과 일치한다고도 볼 수 있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질문을 통해 학습을 한다는 점에서는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문답법도 떠오르게 한다.

이보림의 생각과 시문을 잘 알 수 있는 책은 <월헌집>이다. 월헌집에는 이보림이 자신의 일상을 일지 형태로 기록한 일기가 포함돼 있다. 1925~1926년, 1931~1932년의 친필 일기가 들어 있다. 또 이보림이 병에 걸려 앓고 있을 때 전우가 직접 약을 달여서 부모처럼 돌보아 준 것에 감사하는 내용 등도 담겨 있다.

또 주목할 만한 책은 <화양속리금강송도해주평양유기>다. 이보림이 오진영, 박제철, 김세기, 김홍기, 심종하 등과 기행한 장소를 기록한 책이다. 이들은 화양동, 속리산, 금강산, 송도, 해주, 평양 등을 돌아다녔다. 오늘날로 치자면 동료들과 함께 국토 대장정을 하면서 지은 시를 모은 책이다. 여행을 하면서 긴 두루마리 형태로 남긴 기록은 나중에 책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 이보림이 간재 문인들과 우리나라 곳곳을 기행하며 적었던 <화양속리금강송도해주평양유기> 초고본.


이들의 기행은 단순히 풍유만을 즐기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 곳곳을 둘러보며 원통한 심정을 달래고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서였다. 이보림은 발문에서 '이 시대가 어떤 때인데 산수 유람의 행차를 하겠는가! 다만 후인들과 동지들이 이 책을 보고 비분강개한 심정을 이해했으면 한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다.

전우의 초상화는 당시 '신필(神筆)'이라 불리며 왕의 얼굴인 어진을 그렸다고 알려진 석강 채용신(1850~1941)의 작품이다. 특이한 부분은 전우가 상복을 입고 하얀 관을 썼다는 점이다. 1920년 전우가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고종황제의 삼년상을 치르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전우는 팔순의 나이로 계화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 석강 채용신이 그린 간재 전우의 초상화.

채용신은 1905년 일사늑약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전북 전주로 내려간 뒤 우국지사와 유학자의 초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제작을 주문받은 초상 대신 항일 정신을 지닌 우국지사와 유학자들의 초상을 대가 없이 그렸다고 한다. 전우의 초상화 역시 채용신이 대가를 받지 않고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채용신 화법의 특징으로는 극세필을 사용해 얼굴 세부 묘사에 주력하고, 많은 필선을 사용해 입체감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전우의 초상화에서도 수염 하나하나를 살린 극세필과 얼굴 표현 등에서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전우 초상화를 문화재로 등록할 때 채용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의견도 나왔다. 이준규 교수는 "평소 채용신의 그림에 비해 '못 그렸다'고 해서 가짜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조국을 잃은 데 이어 임금마저 잃은 전통 유학자가 실의에 빠진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초상화에는 전우의 우울함과 비통함이 잘 나타난다"고 말했다.

전우의 초상화가 어떻게 이보림의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보림은 스승의 초상화를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초상화는 신주와 같은 의미다. 서고에 보관해 뒀다. 한 번 꺼낼 때마다 예복을 갖춰 입고 향을 피웠다. 귀한 손님이 올 때만 펼쳐봤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


▶월봉서원 / 덕정로 77번길 11-16.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나리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비밀글로 설정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