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화사. 객사의 일부로 사용된 정자 함허정이 있었던 터에 지어졌다.
동상시장 북쪽 아케이드 출구 나오면
연화사 대웅전 기와지붕 단아하고
금릉팔경 '함허정 이슬 연잎' 아련

시장골목 한켠 방치된 '유공정비' 옹색
서쪽으로 발길 돌려 걷다 보면
복원된 김해읍성 북문 한눈 가득

북문 지나 가락로 나서면 길 건너편엔
117년 된 '약방예배당' 김해교회 반겨

 

일제 강점기에 계룡산인(鷄龍山人) 이동은(李東隱) 선사가 함허정 터에 '김해불교포교교당'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어, 지역의 오래된 분들에게는 '포교당'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1970년 11월 15일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75년 4월 김택수 전 대한체육회장 형제가 모친의 원당으로 중창했다. 네모난 석축 연못 안에 대웅전이 앉은 별난 모양으로, 돌다리를 건너야 예불을 드릴 수 있는 특이 구조다.
 
함허정(涵虛亭)은 연못을 파 분산서 내려오는 호계(虎溪)의 물을 휘돌아 나가게 하고, 가운데에 네모난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지어 올린 정자였다. 왕명을 받아 김해읍성에 오는 손님을 머물게 하던 객사의 일부로서, 연꽃을 심고 물고기와 물새를 넣었으며, 작은 배를 띄워 기생과 풍물을 싣고 뱃놀이를 즐겼다 한다. 정자의 이름이 적실 함(涵)에 빌 허(虛)인데, 빈 것은 하늘이니, '하늘이 빠진 연못'으로도 새길 수 있는 시적인 이름이다. 당시 객사 안에 위치하던 모습은 김해부내지도(1820년경)에 잘 남아 있는데, 2007년 3월 한국문물연구원의 시굴조사에서 현 호안석축 바로 뒤에 당시의 석축 열이 확인되었고, 같은 시기의 분청사기와 명문기와 등도 출토되었다. 북문 밖으로 옮겨진 정자는 이미 사라졌지만, 조선시대 객사 뒷동산의 모습을 잘 남기고 있는 점이 평가되어, 2008년 2월 연화사 경내 전체가 경상남도기념물 제267호 김해객사후원지(金海客舍後苑址)로 지정되었다.
 
▲ 함허정 아래 있었던 연자루의 주초석.
조선후기 김해의 좋은 경치가 '금릉팔경(金陵八景)'으로 노래되었는데, '함허정의 이슬 맺힌 연잎'과 함께, '연자루서 펼쳐 보이는 낙동강 하구의 먼 경치'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래로 흐르는 호계천에 비해 연자루가 너무 높다는 김일손(金馹孫·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주인공)의 쓴 소리도 있지만, 높았기에 낙동강과 바다의 넘실거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것이다. 함허정 아래에 자리해, 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와 함께 손꼽히던 연자루(燕子樓)는 1932년 9월에 완전 철거돼 색 바랜 사진 한 장으로 겨우 남았지만, 정몽주와 맹사성 같은 고려·조선의 명사들이 찾아와 시를 읊기도 했던 명승지였다. 대웅전으로 건너가는 함허교 왼쪽에 팔각으로 다듬은 장대석 하나가 서 있는데, 우여곡절 끝에 단 하나 남게 된 연자루 기둥 받치던 주춧돌이다. 연자루를 찾은 정몽주는 "옛 가야 찾아오니 풀빛 푸른 봄이다. 흥망이 몇 번 변해 바다가 흙먼지로 되었나"라 했지만, 연자(燕子) 곧 제비는 돌아와도 연자루는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 연화사에 들어설 때 연못과 대웅전에 눈을 빼앗겨 바로 왼쪽에 있는 비석 셋을 그냥 지나쳤지만, 가장 안쪽의 비석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자연석을 다듬은 비석 앞면에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 뒷면에는 '분성대(盆城臺)'라 각각 새겼는데, '분성대' 아래에는 가락국 건국 1887년이 되는 해, 그러니까 1928년에 후손 김문배가 세웠다고 되어 있다. 옛날부터 시내에는 3곳의 가락국왕궁후보지가 전해왔는데, 앞에 새겨진 '가락 옛 서울의 궁터'라는 글 때문에 여기도 유력한 후보지의 하나로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2003년 11월 수로왕릉 건너편의 발굴조사에서 봉황토성이 발견되자, 봉황대 동쪽에 있는 '가락시조왕궁허(駕洛始祖王宮墟)'란 비석이 신뢰를 얻게 되면서, 이 비의 의미는 다르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쓴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여행'(지식산업사, 2009)에 맡기지만, 허왕후의 중궁(中宮)이 있었고, 허씨 일족이 대대로 살았다는 전승에 따라, 허왕후 집단의 근거지였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시조왕궁터(봉황동)'와 '고도궁터(동상동)'란 글자 차이에서 수로왕 후대의 왕궁이나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추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가야사연구가 현재진행형인 것은 우리 마을의 전승과 유적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 유공정비. 임진왜란 때 충신 유식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연화사를 나서는 데 깜빡했던 곳이 생각 나 다시 시장으로 들어간다. 동서·남북의 아케이드가 교차되는 곳을 지나자마자, '서울식품'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막힌 듯한 골목 끝에 누런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유공정비다. 유공(柳公)은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지킨 사충신 중 한 분 유식(柳湜) 선생이고, 우물 정(井)에 비석 비(碑)니, '유 선생님 우물에 세워진 비석'이다. 왜적을 맞아 싸우는 데 성안 물이 말랐다. 선생이 객사 계단 섬돌 앞을 지팡이로 파니 물이 솟았다. 이 우물물로 마지막까지 싸웠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우물을 메우고 비를 세웠다. 2m 정도의 화강암 자연석을 다듬어, 앞에는 '유공정(柳公井)'이라 쓰고, 뒤에는 선생의 공적을 새겼다. 국가나 도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아 옹색한 환경에 쓰레기도 함께 뒹구는 모양이지만, 우리 역사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적 보호의 책임을 따지러 가는 건 아니지만, 동회·동사무소 등으로 불렸던 동상동주민센터에 들른다. 1914년 처음으로 동상리가 되고, 광복 후 1947년에 김해읍 동상동이 되었다가, 1981년 시로 승격되면서, 1982년에 발족된 10개 동의 하나가 되었다. 전 김해문화원장 이병태 선생도 '김해지리지'의 서술을 동상동에서 시작했듯이, 시 승격 당시까지만 해도 '김해 1번지'로 통하는 시내 제일의 중심가였다. 새로 하얗게 칠한 청사는 1983년 11월에 세워져 오늘에 이르는데, 내외동이나 북부동 같은 신청사에 비해 좁고 낡아 근무에 어려움도 있겠지만, 크지 않고 세월이 묻어나는 단아한 모습이 오히려 정겹다. 김명희 동장 이하 9명의 직원이 3천709세대 9천445명의 동상동 주민을 돌보고 있다.
 
▲ 김해읍성 옹성북문.
주민센터 앞 연자로(합성초~동상파출소~동회~동상사거리~동광초후문)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파출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새로 복원된 김해읍성북문이 한눈 가득 들어온다. 2007년 2월9일부터 2008년 4월4일까지 34억9천만 원을 들여 흔적으로 남아 있던 돌무더기를 웅장한 성문으로 되살렸다. 원래 동서남북의 4대 성문이 있었으나,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표상에 흔적이라도 남아 있던 북문을 우선 복원했다. 앞쪽에는 성문을 보호하는 반원형의 옹성이 둘려졌는데, 오른쪽으로 돌아들면 공진문(拱辰門)이라 쓴 현판이 올려다 보인다. 팔짱 낄 공, 또는 두 손 맞잡을 공에 진은 북쪽 또는 북쪽에 앉은 임금을 뜻하니, 완고하게 팔짱 낀 무사가 북쪽을 막겠다거나, 두 손을 맞잡아 북쪽에 계신 임금께 예를 갖춘다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나, 세워졌던 시대나 김해의 입지를 보면 후자의 뜻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성벽은 문 양 끝의 극히 일부만 복원되었지만, 동쪽 성벽 연장선에 있는 '새김해주차장'과 '미성아트빌' 아래서는 아직도 남은 성벽을 만날 수 있다. 성벽 위에 아파트와 주차장이 올라 앉은 셈이다. 지금은 성문 앞에서 호계로로 가는 길이 말끔한 아스팔트길로 정비되었지만, 계획도로 건설에 앞서 진행된 경상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에서도 성 앞의 해자, 분청사기와 기와 같은 읍성 관련의 흔적들이 다수 확인되기도 했다.

▲ 김해교회
가던 길을 되돌아 북문을 지나 가락로에 나서면 길 건너로 역사 깊은 김해교회와 만나게 된다. 1894년 전라도에선 동학꾼들이 죽창을 들고 황토벌을 내달릴 때, 충주관찰사의 후손인 한의사 배성두가 세워 '약방예배당'이란 별명도 있었단다. 올해로 117주년을 맞는다. 지역 최초는 물론이고, 전국에 100년을 넘는 교회가 100여 개를 헤아린다지만, 외국인선교사가 아닌 한국인이 세운 교회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귀하다. 긴 역사만큼이나 김해지역의 근대화와 독립운동, 현대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도 적지 않다. 1907년 근대교육기관으로 합성학교를 세웠고(1909년 인가), 배성두 장로의 아들 배동석은 지역의 3·1운동을 선도하다 고문 끝에 사망해 198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27년 유치원을 설립해 아동보육을 시작했으며, 1930년에는 김해극장에서 수재민구제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94년 100주년을 맞이한 김해교회는 2007년부터 '김해시민과 함께하는 알파음악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오랫동안 '김해생명의 전화'를 이끌며 김해의 생명을 구하고 있는 이진규 집사는 여기 출석교인이다. 요즈음 같지 않게 소박한 예배당과 담장 옆 몇 그루의 키 큰 향나무는 오히려 세월의 정감과 지역사회 기여의 전통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 1994년 부임한 조의환 목사가 시무 중인데, 지난 시장선거에서 공천 받지 못했던 김종간 후보가 교회에 나오면서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임기가 끝난 지금도 성도들 사이에 화제란다.


Tip - 연화사 담장 밑 마애불 ──────
7조각 파편 끼워맞춘 미륵부처
중생 용서하듯 변치않는 미소

▲ 연화사 미륵부처
연화사 대웅전의 뒤쪽, 동상동주민센터 쪽 낮은 담장 아래에는 찾는 이 하나 없어도 언제나 웃고 있는 미륵부처님이 계시다. 이병태 선생의 '김해지리지'에 따르면, 원래 불암동 선유대 미륵암 뒤에 있었는데, 1972년의 남해고속도로공사로 파괴되었던 것이 1974년 7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한다. 그런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대규모 공사 현장이라면 국가나 지방문화재라도 파괴되기 일쑤였다. 그러니 비지정의 이 부처님이 파괴의 화를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의 지형으로 보아 아마도 불암동 현대자동차정비공장 맞은편 언저리의 바위산이 헐어 내려지면서 함께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완전히 파괴되어 흩어진 파편의 일부를 배석현 회장의 김해불교신도회가 주워 모아 연화사 경내로 옮겼다 한다. 수습된 7조각 정도의 파편에 적당히 다른 돌들과 함께 끼워 맞춰 얼굴과 상반신의 일부만 갖추어진 상태다. 머리와 몸 뒤에 바위가 붙어 있는 모양이 자연 바위에 선을 그리고 돋을새김 했던 마애불로 보인다. 인자하게 늘어진 귀와 두상, 그리고 남은 왼손의 수결로 보아, 왼손을 받치고 오른손 손바닥을 앞으로 내민 항마촉지인의 미륵불로 여겨진다. 김해시 불암동(佛岩洞)의 '부처바위마을'이란 이름이 바로 이 부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라도 이제는 꼭 지켜야 할 문화재다. 깨지고 잡석으로 끼워 맞춰져도 미륵부처님은 오늘도 김해의 중생을 위해 웃고 계신다.







이영식 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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