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황대유적 선착장 자갈마당.




김해도서관을 나와 내외동 쪽으로 조금 가다 봉황교 앞 횡단보도에서 분성로를 건너면 봉황대유적공원이다. 유적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세 군데 정도가 있지만, 이 부근이 가야의 거리와 유적공원으로 정비된 이래 이쪽의 이용이 부쩍 늘었다. 김해도서관 맞은편에 있는 대형주차장과 한국의 아름다운 화장실로 선정된 해우소가 있기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예전에는 수로왕릉 건너편의 중앙시장이나 회현동주민센터 쪽에서 봉황대로 향하는 동쪽 길이나, 중부경찰서 쪽에서 봉황대유적 패총전시관이 들어선 회현고개를 통해 봉황대로 오르는 남쪽 길이 보통이었다. 깨끗하게 단장된 봉황교 쪽의 입구도 좋지만, 동쪽과 남쪽의 좀 오래되고 복닥복닥한 길도 걸어보길 권하고 싶다. 때 묻은 세월의 편안함과 사람 사는 세상의 끈끈한 향수는 다른 데서 만나기 어려운 추억의 한 장면을 연상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 기마전사상.
봉황교 쪽 입구에 서면, 유적안내판과 기마전사상 사이로 넓은 잔디광장과 제법 높은 목조건물이 들여다보인다. 오른쪽에 서 있는 기마전사상은 공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검문이라도 하듯 제법 긴장한 모습이다. 1~2년 사이에 새로 세워진 것 같은데, 어느새 뻘겋게 흘러내린 녹물자국이 흉물스럽다. 둥근 챙이 달린 몽고발 모양의 투구를 이마까지 덮어 쓰고, 왼손에 방패와 오른 손에는 창을 들고, 몸에 철갑옷 두른 말을 타고 있다. 가야중장기병의 당당한 모습이다. '가야기마인물상'으로 이름 부쳐진 이 상징물은 원래 김해시 대동면 덕산에서 출토되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5세기경의 기마인물형토기를 모델로 한 것이다. 등 뒤 양쪽에 뿔 모양의 잔이 있어, 가야의 왕이나 장수들이 희생양의 피나 술을 나눠 마시며 군사적 동맹을 거행하던 의례에 쓰인 특별한 형식의 기물로 생각되고 있다.
 
시기적으로 저 압록강가에 서 있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처럼, 기마군단의 고구려를 상대했던 가야기마전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보아 좋다. 상징물로 세워진 기마전사상의 오른손에는 긴 창이 들려 있지만, 기마인물형토기의 전사는 장창을 잃어버린 채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서 있다. 문화재수집가 이양선 박사가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있게 되었지만, 출토지에 있는 가야사전문박물관의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한동안 귀환을 위한 시민운동이 추진되기도 했는데, 요즈음은 소식이 좀 뜸하다. 기마전사상은 시청 본관 앞을 비롯해, 김해로 들어오는 길목이나, 큰 교차로와 해반천에 걸쳐진 다리 장식 등으로 시내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습 또한 조금씩 다르고, 전체적으로 국보 275호의 기마인물형토기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조금 다르거나 우둥퉁하게 표현되었던 듯해 진품의 날렵한 맛과 다른 차이가 느껴진다.
 
▲ 김해부사 정현석이 '봉황대'를 새긴 바위.
넓은 잔디광장을 가로지르면 인공으로 만든 자그마한 호수 가에 몇 채의 높은 마루가 달린 창고형 목조건물과 높은 망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2002년과 2003년에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가 발굴조사 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복원한 봉황대유적이다. 물가에 깔려 있는 자갈마당은 가야시대에 배를 끌어 올려 수선하던 시설이었고, 호수와 창고건물 사이의 경계선 밑에는 당시의 호안시설이 보존되어 있다. 해반천 쪽의 바닷물이 넘어 오지 못하도록 목재와 석재를 점토에 섞어 다지고, 군데군데를 나무못으로 고정시켜 쌓아올렸던 기다란 둑의 호안시설이었다. 그 안쪽에 늘어선 창고형 건물들은 조사된 건물자리 위에 일정 두께의 흙을 덮고 복원해 올렸다. 건물자리의 조사에서는 돌이 아닌 통나무로 기둥이 받혀지고 있던 사실도 확인되었는데, 초석의 무게를 줄여 습지에 건물이 가라앉지 않도록 궁리했던 가야인의 빛나는 건축학적 지혜였다.

 











가야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발견되었던 고대 해상왕국의 항구는 시가 처음 계획했던 가야민속촌 조성사업 대신에 물을 채우고 작은 배까지 띄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 정비되었다. 장기간의 발굴조사로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었고, 처음 시도해 보는 고대 항구의 복원이었지만, 근거도 없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급조의 민속촌에 비해, 확실한 역사·고고학적 사실에 기초한 복원과 정비로 전국 어디에도 없는 전혀 새로운 내용을 세상에 자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해상왕국의 항구 발견되다" 라고 흥분했던 글도 썼고, 그런 만큼 이 유적 공원은 당당하고 생명도 길 것으로 생각한다.
 
되살아난 가야항구의 창고 건물들을 돌아보고 망루를 거쳐 봉황대에 오른다. 망루를 조금 지나 제대로 된 길을 버리고, 왼쪽 비탈의 좁은 배수로를 따라, 길도 아닌 길을 씩씩거리며 오른다. 두 단의 짧은 언덕을 오르면, 왼쪽으로 황세바위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봉황대에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돌계단을 올라 성긴 조릿대 숲과 큰 나무 사이를 누비다 보면 바위들이 널려 있는 봉황대 꼭대기에 이른다. 바위 중에 조금은 치졸하게 가라대(伽羅臺)라 새긴 것도 있다. 아래 쪽 황세바위가 개라(介羅)바위라 불렸던 것을 상기하면, '가라'의 김해 사투리가 '개라'였으니까, 가라 곧 가야와 관련된 지명의 흔적을 전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 여의 낭자와 황세 장군의 슬픈 로맨스가 깃든 황세바위.
정상이라고 시원스런 전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해의 오랜 전통을 지명으로 웅변해 주는 봉황대의 이름이 남게 했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도시들은 반드시 봉황대란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1623년에 세워진 망해정(望海亭)이 있어 바다 내려다보기 좋았다지만, 지금은 나무들 나이로 너른 김해평야와 흥부암이 건너다보이는 정도이다.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양이라 봉황대라 불렸다는데, 여기가 봉황의 머리라면 황세바위가 있는 북쪽 언덕이 오른 쪽 날개고, 동쪽 회현동패총 쪽으로 뻗은 언덕이 왼쪽 날개가 될 터이다. 김해를 등에 업은 봉황이 남해 바다를 향해 비상하는 형상을 생각했기에 그런 이름이 부쳐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봉황대란 이름은 여기서 남쪽으로 몇 발자국 내려가면 확인할 수 있다. 고종 초에 김해부사 정현석이 봉황대를 세우면서 자신의 호인 박원(璞園)과 함께 봉황대란 이름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 바로 전에 불이 났었는지, 아래쪽의 풀과 나무가 모두 타버렸고, 글이 새겨진 바위까지 까맣게 그을렸다. 바위 아래쪽에 있는 두 채의 건물은 허훤(許煊)이 세웠던 재실을 경주 이씨가 매수해 재사로 쓰고 있는데, 경주이씨 김해화수정(花樹亭)이라 쓴 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어 막다른 길이 되고 있다. 막힌 길을 되돌아 나오면 왼쪽에 여의각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돌계단이 있다. 가락국 제9대 겸지왕(鉗知王) 때 여의낭자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여의각은 1975년 6월에 세워진 사당이다. 누군가 뚫어 놓은 창호지 틈으로 들여다보이는 여의낭자의 모습은 황세장군과의 슬픈 로맨스처럼 애처롭게 보였다.
 
가락국 출정승의 딸 여의가 황정승의 아들 황세와 약혼했으나, 황세가 신라군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장군이 되고, 왕이 유민공주와 혼인시키자, 여의는 출가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다 세상을 떠났고, 여의를 잊지 못하던 황세도 병을 앓다 같은 해에 죽었다는 어디에나 있을 법하고 어디에도 없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 무대가 봉황대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여의가 죽어 하늘로 올랐다는 하늘 문, 두 사람이 약혼했다는 황세바위, 어렸을 때 오줌 멀리 누기 경주를 했다는 조릿대 숲속의 소변터 등의 전승이 좁은 공간에 곳곳에 아로새겨져 남아 있다.
 
▲ 여의각 뚫린 창호지 사이로 보이는 여의낭자 초상화.
여의각에서 북쪽으로 처음 올랐던 돌계단을 내려와 황세바위를 지나면 너른 터 끝에 가락국천제단(駕洛國天祭壇)이라 새긴 비석이 보인다. 언제 누가 세웠는지는 새겨져 있지 않지만, 금강조은병원 재단이사장 허명철 박사가 주동한 것이란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쨌거나 김해의 지방수령이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에 제사 지내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던 터이니 방식은 다르지만 전통의 계승은 이런 식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원래의 사직단은 정방형 하단 위에 원형의 원단이 있었던 구조였던 것 같으나, 족구장처럼 반듯하게 밀어버린 곳에 그런 흔적이 남았을 리 없다. 가야시대의 언덕이 아울러 삭평되었음은 둘레 경사면에 무수히 널려 있는 조가비들과 가야토기파편들로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전통도, 시민들의 체육시설도 중요하지만, 우선 제대로 된 조사를 거쳐 그에 상응하는 내용으로 복원 정비나 개발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는 조금 전에 가야의 항구 같은 복원과 정비의 성공사례를 보지 않았던가.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해야 함이 아쉽기만 하다.
 
천제단을 내려와 아래 길을 오른쪽으로 따라 돌아 얼마쯤 가면 가야시대의 집들과 창고 등을 만들어 세우고 벤치도 두어 앉아 휴식할 수 있는 곳이 있다. 1990년대 초에 시민체육공원 만든다고 2천년의 유적공간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버렸지만, 각종 체육시설을 치우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꾸며지게 되었다. 다만 역사적인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산청에서 확인된 선사시대 마을의 공회당 건물이나 용원에서 조사된 벽체건물 등을 본따 만들었던 것에 불과하였다. 체육공원 면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목책 울타리 사이로 난 비탈길을 내려간다. 아래로 조개 모양 뚜껑을 씌운 패총단면전시관과 예전에 우리 국사교과서의 처음을 장식했던 회현동 패총의 언덕이 눈에 들어온다.





▲ 회현리패총전시관.
망설이지마시고, 문 오른 쪽에 있는 네모난 버튼을 누르세요. 그리곤 감상하세요. 높이 9m의 엄청난 조가비 층이 3면으로 펼쳐지는 가야시대 쓰레기장의 박력(?)을.
 
1920년 일본인들이 잘못 조사했던 단면을 다시 발굴하고 정리해, 2006년 10월 10일 패총단면전시관으로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가야인들이 먹었던 조개와 함께 버려진 쓰레기들은 가야인의 생활과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 화천.
40여종의 조가비들은 굴 25%, 대합 8%, 꼬막 2% 등등의 비중으로, 담수조개는 2~3종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구성비는 바로 앞이 갯벌이 발달한 너른 바다였음을 보여줍니다. 패총단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 뽑던 가락바퀴나 사슴뿔을 갈아 만든 단도손잡이, 많은 가야토기파편들이 숨은 그림 찾기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특히 1920년에 출토됐던 화천(貨泉)이란 동전 한 닢은 해상왕국 가야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중국서 만들어진 돈이 황해도~해남~큐슈~오사카까지에서 발견됩니다. 불과 10년밖에 쓰이지 못한 돈이었지만, 황해도(대방군)~김해(가락국)~큐슈북부(마츠라국)를 왕래하는 2년 반의 바닷길에서 점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바다 길을 통한 무역이 얼마나 빈번했던가, 또는 고대의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개무역항의 김해가 얼마나 번성하고 있었던가를 웅변해주는 것입니다. 다만 당시 최고의 귀중품이이라 버린 것은 아니었을테니, 수로왕네 애 정도가 여기서 놀다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혼이 났겠지요. 하지만 녀석의 부어오른 엉덩이 덕분에 우리는 해상왕국 가야의 역사를 되살릴 수 있었던 겁니다.






이영식 인제대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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