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로왕릉 동쪽 돌담길. 김해합성초등과 사잇길을 두고 길게 뻗어 고즈넉한 풍광이 운치 있다.
수로왕릉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오늘의 발걸음은 일종의 역사문화유적답사 같은 일정이 되겠지만, 지난번에 지면이 다해 '억지로' 걸음을 멈추어야 했던 곳이 있다. 지난 호의 종착점이었던 김해교회와 옆구리를 맞대고 있는 김해합성초등학교다. 김해합성초등학교를 김해교회와 함께 둘러봐야 하는 이유는 같이 붙어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1907년 김해교회의 배성두 장로가 근대교육기관으로 세우고, 1909년에 사립합성학교로 인가를 받았던 데서 시작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탄생에 관련되는 문제였는데, 필자의 무계획성과 느슨한 시간개념 때문에 발길이 나뉘었던 것이 못내 아쉬워 '억지로'라 표현했고, 그렇기 때문에라도 오늘의 발걸음은 여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 김해합성초등학교 건물과 김해교회.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듯 옆구리를 맞대고 이웃해 있다.
김해교회에서 가락로를 따라 시내 쪽으로 내려오다, 첫 번째 작은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연자로를 따라 조금 가면 학교정문과 만난다. 철책을 헐어내고 수목과 화초로 꾸미는 새 담장 만들기가 한창이다. 생명 존중할 줄 아는 아이들로 밝게 키우기에는 철책보다 부드럽고 살아있는 수목담장이 제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정에 들어서 요즘 보기 힘든 흙바닥 운동장을 가로 지르는데, 흰 바탕에 연두와 핑크색 선을 넣은 본관건물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건물꼭대기에 학교이름과 나란히 쓰여 있는 'SINCE 1909'가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한 눈에 알게 한다. 2009년 4월,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던 긴 역사에 비해 정면 본관, 오른쪽에 식당과 도예체험실, 왼쪽에 유치원이 전부인 단출한 건물배치는 점차 줄어만 가는 도심지역 아동인구의 심각성을 짐작케 한다.
▲ 김해합성초등학교 내 '허발박석권선생공적비'.
 
중앙현관으로 들어서는 왼쪽에 자리는 조금 옹색하지만 잘 생긴 거북이 받침(龜趺)과 예쁜 머리를 갖춘 검은 대리석의 '허발(許發)·박석권(朴錫權)선생공적기념비'가 있다. 비문에 따르면 1922년 허발 선생은 논 200마지기 값인 2만원을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은밀히 보내고, 다시 논 5백석지기를 내어 박석권 선생이 내신 3백석지기와 합해, 6년제 합성학교와 2년제 고등과가 공부할 수 있는 2층 벽돌건물을 짓게 하셨단다. '10년 뒤를 위해서는 나무를 키우고, 100년 뒤를 위해서는 사람을 키우라'는 비문의 말처럼 일제강점기에 사재를 털어 민족의 인재를 길렀던 두 분이야말로 지금의 김해합성초등학교가 있게 한 은인이다. 1967년,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에 문교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던 안호상 박사의 글을 받아 두 분의 공을 기리는 비를 세운 것이다.

 
▲ 합성초등학교 중앙현관 진열장.
현관 복도에 올라 가야토기와 민속자료들이 전시된 진열장을 기웃거리는데, 마침 밖으로 나가시던 교감선생님께서 날이 춥다고 교무실로 안내해 주신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얻어 마시며 학교소개도 듣고 마침 계시던 사회과 선생님과 바깥 화단에서 아직도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고 있는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에 대한 조금 다른 생각도 나누었다. 35명의 교직원과 18학급 425명의 재학생이 함께 가르치며 배우는데, 김해시가 50만 돌파기념으로 선정한 '김해를 빛낸 인물 10인'의 김환옥 선생님도 계시고, '우리 마을, 우리 학교'를 슬로건으로 학생·학부모·교사의 공동체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이재돈 교장선생님은 이들이 함께 하는 가야도예체험교실을 2년이나 운영해 오고 있으며, 지난 해 12월에는 수강생들의 도예작품과 자신의 김해문화유적사진을 합한 200여점을 김해도서관에서 전시하기도 했단다.
 
밖으로 나오며 현관 양쪽에 심어진 100주년 기념의 반송(盤松)에 눈길을 주는데, 올 2월 18일에는 69회 졸업식이 예정되어 있고, 일제강점기를 제외하고 총 1만7천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음도 일러 주신다.

이 졸업생들 중에는 우리 지역을 위해 힘쓰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서울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박진배(10회) 선생은 1994년부터 매년 30~40명의 재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34회 동창회를 이끌고 있는 김용철 성형외과 원장, 김해한솔병원 홍태용(35회) 원장 같은 의사도 많고, 교편을 잡으면서도 연극과 문화재보호 활동도 하고, 지금은 김해문화원 원장으로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한고희(15회) 선생과 한국폴리텍7대학 동부산캠퍼스 황석근(25회) 학장 같은 교육자들도 있다.

정치 행정 쪽으로 시청의 이종숙(22회) 총무국장, 이유갑(28회) 도의원, 배정환(35회) 시의회 의장 등도 있고,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장쾌한 중거리 슛으로 아르헨티나 골문을 열어 제치며 한국 월드컵출전사상 첫 골을 기록했던 박창선(24회) 선수도 있다. 1998년 청소년대표팀(U20)을 이끌고 아시안게임서 우승도 하고, 경희대 감독을 역임했던 그가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 김해활천초등학교 근처에 '박창선축구클럽센터(055-327-0827)'를 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학교 역사만큼이나 오래 있었나 보다. 본관 서쪽 쪽문을 통해 황망히 학교를 나서는데, 괜한 빙그레 웃음이 절로 난다. 허리 굽히고 고개 수그려 나서는 쪽문에서 은밀한 옛 추억이라도 생각날 것 같아 그런 모양이다.

▲ 수로왕릉 정문 앞 광장.
수로왕릉(首露王陵) 동쪽 담장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돌담 모퉁이를 오른 쪽으로 돌면 정문 앞 광장에 이른다. 몇 년 전만해도 꽤 어수선했었는데, 공간도 넓히고, 박석도 깔고, 예쁜 소나무도 심어 분성로 쪽에서 바라보기에 제법 좋은 그림이 되었다.

수로왕 뵈러 숭화문(崇化門)을 들어선다. 왕께서 우리를 교화해주신 은혜를 받들겠다는 뜻이리라. 수로왕릉이라면 가야보다 먼저 생각나는 주인공의 유적이라 김해 돌아보는 타지 분들도 빠뜨리지 않지만, 어려서부터 사생대회나 백일장, 소풍 등으로 친숙했던 김해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 왕릉을 보려면 지나가야하는 가락루 밑.
숭화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먼저 보이지만, 무지하단 소리가 듣기 싫거나 왕을 기리는 마음을 제대로 표하려면 발밑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가운데가 넓고 높으며, 좌우 양쪽이 낮고 좁게 3등분 되어 있는 길 중에서 가운데는 걷지 않는 것이 옳다. 가운데 넓은 길은 신도(神道)라 하는 데, 수로왕의 신령만 다니시는 길이기 때문이다. 들어 갈 땐 오른 쪽, 나갈 때는 왼쪽으로 사람이 다니는 인도(人道)로 걷는 것이 합당하다.
 
가락루(駕洛樓) 밑을 지나면 납릉정문 뒤로 왕릉이 보인다. 둥근 봉분은 높이 5m, 지름 6m 정도로, 서기 199년에 수로왕 돌아가셨을 때 그대로는 아니겠고, 한참 후대에 왕의 외손이 되는 신라 문무왕의 개축으로 지금처럼 크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납릉정문이란 들일 납(納), 왕릉 릉(陵)이니, 왕릉으로 들어감을 허락하는 문이라는 뜻인데, 양쪽 문 위에 모두 신기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두 마리의 신령스런 물고기가 하얀 탑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는 문양이라 신어상(神魚像) 또는 쌍어문(雙魚紋)이라 불린다.

▲ 태양문이 새겨진 비석.
다시 고개를 왼쪽 뒤로 돌려보면 3기의 비석 중에서 가장 안쪽 것 머리에 바람개비처럼 생긴 태양문(太陽紋)이 새겨져 있다. '왕릉의 수수께끼'로도 불리는 이 문양들이 인도의 야요디야에서도 흔하게 보인단다. 마침 '삼국유사'에 수로왕비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기록한 것이 있어, 이것을 그 흔적으로 보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세상에서 회자되는 '인도공주'의 이야기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 진실의 문제는 필자의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역사여행'에 맡기기로 하지만, 고대의 낭만적 상상력과 탐구의욕을 부채질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숭선전.
오른쪽으로 작은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숭선전(崇善殿)이 있고, 그 옆에 2대 거등왕부터 9대 구형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조금 더 긴 숭안전(崇安殿)이 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15일이 되면, 전국의 김해김씨, 김해허씨, 인천이씨 분들이 모여 양쪽에 제사를 지낸다. 1시간 정도 진행되는 제례는 서울의 종묘대제보다 작지만,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될 정도니, 혈연적 후손이 아니라도 김해에 사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참관해 봐야할 우리 지역의 중요 문화유산이다.

김해의 가장 커다란 축제인 가락문화제 또는 가야문화축전이 이 날을 중심으로 정해지고 있는 것도 그런 연유와 중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종묘대제가 조선의 왕을 모시는 제례라 유교식 제례로 행해짐은 당연하겠지만, 유교사회가 아니었던 가야국왕 들의 제사 역시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라고 했던 우리 지역 김정권 국회의원의 지적은 다시 새겨 볼만하다. 물론 관련 자료가 전무에 가깝기 때문에 대안 없는 비판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으나, 제례에 사용되는 기물이나 절차 중 일부라도 가야적인 요소를 도입할 수는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해야 서울의 종묘대제와 차별성을 가진 우리 지역만의 제례로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조금은 다른 생각도 하면서 수로왕릉을 관리하시고 대제를 비롯한 왕릉의 모든 행사를 주관하시는 숭선전 참봉님을 뵈러 간다.
 
아! 여러분들은 나가시기 전에 연못 오른쪽 구석 담장 밑에 있는 6개 알 모양의 조각도 보시고, 뒤편의 왕릉공원도 한가롭게 거니시길 바랍니다. 6란 조각은 수로왕 탄강하신 구지봉에서 옮겨 온 것이고, 왕릉공원에는 수로왕 등장하시기를 빌었던 가락마을 아홉 촌장인 구간(九干) 시대 사람들의 무덤이었던 고인돌도 있으니까요.


Tip - 숭선전 김봉대 참봉 ──────
춘·추향대제 주관
'살아있는 가야인'

▲ 숭선전 김봉대 참봉님.
"지난 추석 때 필리핀의 라모스 전 대통령이 왔었는데, 왕릉에 참배하면서 얼마나 감격해 하는지 몰라. 외국원수도 우리 전통문화와 가야역사가 소중한 걸 아는데, 우리가 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지난 2월 16일 김봉대(金鳳大) 숭선전 참봉님을 찾았을 때, 조금 탄식이 섞인 말씀이었다. '살아있는 가락인? 아냐 마지막 가야인?' 등등의 표제어를 미리 생각하며 가는 인터뷰라 그런지 부담이 컸다. 급하게 연락드렸는데도 쾌히 시간을 허락하셨다. 원래 왕릉에는 두 분의 참봉이 계시는데, 능 참봉님과 숭선전 참봉님이시다. 직명만 보면 능의 관리와 숭선전 제례의 주관을 분담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언제나 김해에 계시면서 모든 것을 주관하는 분이 숭선전 참봉님이시다.

매일 아침마다 능에 가서 분향 참배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하절기에 아침 5시, 동절기에 아침 6시에 숭선전에 분향하고, 추석 동지 정월에는 잔을 올려 헌작하고, 음력 3월과 9월의 15일에는 전국적 행사 춘·추향대제를 주관하는 매우 힘든 직책이다. 올해로 86세 되신다는 데, 2009년 10월 1일 부임 이래 아무 탈 없이 책무를 수행하시는 건강이 부럽다. 그렇기에 참봉 선정규정은 참 까다롭다. 심신건강은 물론, 사지 모두 온전해야
▲ 수로왕릉 춘·추향대제.
하고, 이혼·축첩·자녀의 동성혼, 형법상 처벌경력, 상중인 사람도 안 되며, 상을 당하면 참봉직을 포기해야 한다.

참봉 자신이 가락국왕들께 드리는 깨끗한 폐백이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활발한 가야사연구를 위해 김해에 '가야역사문화센터'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하시면서, 나서는 필자를 배웅하며 인도로 보낼 물품들을 챙기셨다. 인도에서 허왕후비 설립 10주년 기념행사를 위한 것이라 하신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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