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석마을 전경. 사진제공=장유면지

 

무성할 무(茂), 시내 계(溪). 장유 무계리는 이름 뜻 그대로 대청천과 능동천, 피내천 등 많은 물길이 지나가는 곳이다. 배후습지로 형성된 넓은 평지는 장유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밑천이 됐다. 120년 전부터 교통, 행정, 교육, 경제가 밀집돼 장유 1번지로 불렸던 무계리는 대청천을 따라 광석·무계마을로 나눠진다.
 

 

지석묘 등 돌과 연관돼 이름 붙은 광석마을
옛 무계장터에 주민 3천명 모여 3·1운동
십시일반 돈 거둬 용두산에 기념탑 건립

오래된 정자나무 두 그루, 무계마을 지켜와
당산나무 옆 가축시장 열려 소, 돼지 거래
장유면 남·북 이어주던 무계교, 추억 장소

신도시 성장 뒤편으로 그늘진 골목이
도시재생 시범사업 선정, 재도약 기회




■광석마을

광석마을 이름은 돌과 연관돼 있다. 마을이 넓고 큰 바위 위에 놓여있어 광석(廣石)이 됐다는 설과 광석 1구에 위치한 지석묘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돼 있는 지석묘는 광석마을회관 인근에 위치해 있다.
  
제18대 장유면장을 역임했던 송봉업(70) 씨는 "어렸을 땐 지석묘를 광석바위라고 불렀다. 바위 옆에는 큰 나무가 있었는데 여름이면 나무 그늘 밑에 누워있기도 했고 모심기에 지친 어르신들은 낮잠을 자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 광석마을 전경. 사진제공=장유면지


광석마을은 일제시대 때 3·1운동이 일어난 곳이었다. 광석 4구에는 옛 무계장터였던 장유중앙시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독립운동장소가 됐다.
 
송 전 면장은 "당시 전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000여 명의 장유주민이 4월 12일 무계장터에 모여 헌병들과 대치했다. 3명이 죽고 12명이 연행된 큰 사건이었다. 이후 내덕동과 무계동 경계지역에 있는 용두산에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3·1탑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감응관(65) 주민협의체 위원장은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둬 3·1탑을 만들었다. 장유중학교 학생들이 모두 동원됐다. 체육시간이나 방과 후가 되면 책가방에 자갈, 모래, 물을 넣어 나르기 바빴다"고 덧붙였다.
 

▲ 광석마을회관 인근에 경남도 기념물 제151호인 지석묘가 자리하고 있다.

장유중앙시장은 3일, 8일 마다 열리는 오일장이다. 원래 신문리에 형성됐던 장이였지만 무계리로 옮겨오면서 신문장, 장유장, 무계장 등 여러 이름을 갖게 됐다. 처음 시장이 열렸을 땐 물물교환 장소로 이용되다 점차 물건을 떼다 파는 상인들이 등장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인근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진례면, 진영읍 주민들도 쉽게 오갈 수 있는 서부 교통 요충지로 발전했다.
 
<장유면지>에 따르면 1960년대 이전에는 200여 가구가 거주했다고 한다. 각종 상가건물이 들어서고 도시화가 시작되며 토박이들과 이주민들이 섞여 살기 시작했다. 
 
송 전 면장은 "당시 마을에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장사를 하던 상인들과 직장인들이 많았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마을이 급속히 성장했고 외지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장유시장은 현대화 정비사업으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장유시장번영회는 시장 활성화를 위해 상설점포 운영, 시설 정비 등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무계마을
 
무계마을은 육로와 수로가 통하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인구의 이동이 활발했다.
 
마을에는 당산나무와 수령이 오래된 정자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계1구에 위치한 포구나무는 개울에서 떠내려와 자연스레 심어진 나무라는 속설이 전해진다. 무계2구에 자리한 왕버들나무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당산나무다.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항상 당산제를 지내오고 있다. <장유면지>에 따르면 한때 당산나무 옆에서 400평 규모의 가축시장도 열렸다고 한다. 소와 돼지, 개, 닭 등을 가져와 거래했고 돼지국밥과 국수 등 먹거리를 팔기도 했다. 가축시장은 1977년 농촌소도읍가꾸기 사업이 진행되며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이곳을 소를 팔던 곳이라 하여 '소전걸' 혹은 '소전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1937년에 준공된 무계다리는 당시 장유면의 남·북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했다. 여름이면 뜨거운 빛을 피해 더위를 식히는 휴식공간이 됐고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어둠이 깔리는 밤에는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는 변사의 이야기 마당이 펼쳐져 주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로 무계교 밑에서 시장을 열기도 했다. 하천의 물이 말라 장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되면 주민들은 시끌벅적하게 장을 열었다. 평상시에는 조용하던 곳이 갑자기 사람들로 북적이게 되면 하늘이 놀라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었다. 무계교는 1979년 태풍피해로 붕괴됐으나 이듬해 재건했다.
 

▲ 옛 무계교 모습(왼쪽, 사진제공=장유면지)과 1979년 태풍으로 붕괴된 후 재건된 무계교.


 100년 전통의 역사를 가진 '장유양조장'도 인기였다. 송 전 면장은 "맛있는 막걸리는 물맛으로 결정된다. 김해에서 상동면과 주촌면, 무계리의 물맛이 가장 좋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는 "양조장에 가면 마음껏 막걸리를 마시고 갈 수 있었다. 방문객들을 위해 안주로 소금을 가져다 놓을 정도로 양조장 대표의 인심은 넉넉했다"며 미소 지었다.
 
장유양조장은 가업을 이을 사람이 없어 문을 닫았다. 막걸리의 원재료가 되던 달고 시원하던 지하수도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서서히 마르기 시작했다.

감 위원장은 "대청천에도 깨끗한 돌이 많았다. 물이 깨끗해 빨래터나 목욕탕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풀만 무성하고 수질도 오염돼버렸다"고 아쉬워했다.
 
현재 무계동은 장유 신도시 개발로 인해 점차 낙후되고 있다. 유동 인구로 북적였던 무계동 골목 곳곳에는 폐가와 빈 점포들이 즐비해 썰렁함만이 감돌고 있다.
 
최근 쇠퇴하고 있는 무계지구를 되살릴 수 있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 시범사업 공모에 최종선정(김해뉴스 지난 20일자 2면 보도)된 것이다. 시는 향후 5년간 장유중앙시장 일원 19만 9600㎡에 생활밀착형 시설을 설치하는 등 정비에 나설 계획이다.
 
무계신도시재생협의회 회장을 맡은 감 위원장은 "도시재생을 통해 낙후된 무계동이 활성화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끝>

김해뉴스 /배미진 기자 b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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