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참상, 여성의 시선으로
공백 강요받은 역사의 이면



종전 100년을 맞아 최근 다시 사죄의 마음을 표현하며 뉴스에 오르내린 독일. 홀로코스트 등 잔혹한 살상을 저지른 전범국 독일에 독일인 피해자가 있다는 생각은 언뜻 하기 어렵다.

여기 피해자들이 있다. 독일 베를린을 쳐들어온 러시아 병사들의 무차별적 성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독일인 여성들이다. 이들 중 한 여성이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점령한 데 이어 연합군이 승리해 독일을 분할통치하기 시작한 1945년 4월 20일~6월 22일 베를린의 참혹한 하루하루를 가감 없이 글로 남겼다.

'1945년 4월 20일 금요일 오후 4시, 그렇다. 전쟁은 베를린을 향해 밀려오고 있다'로 시작되는 기록은 당초 일기 형식에 메모·약자·단어 위주의 짧은 글이었다가 보완을 거쳐 121쪽짜리 원고로 거듭났다. 전쟁이 끝난 뒤엔 익명을 전제로 1954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기도 했다. 역사에서 외면받은 여성 피해자의 시선으로 전쟁의 또 다른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며 후세대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잔혹한 범죄에 대한 침묵의 벽을 허물었다'는 독일어판 출판사 후기에서 알 수 있듯 책은 공백으로 남겨진, 혹은 공백으로 남을 것을 강요받은 역사의 이면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4월 27일 금요일 파국의 날부터 시작된 '그 일'은 너무나 빈번하고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이뿐 아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는 비겁한 몸부림, 사소하고도 비열한 보복 심리 등 추악한 인간 본성과 전쟁의 단면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토머스 홉스의 말을 수시로 인용한 저자의 생생한 기록은 여성으로서 겪어내야 할 고통과 인간으로서 감내해야 할 고뇌와 절망을 무시로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성폭력을 집단 경험으로 여긴다. 성폭력은 이제 사방천지에서 일어나며, 심지어 협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같은 집단적 강간 경험은 집단적으로 회복되는 중'이라고 저자가 말했듯 전쟁의 비극 속에서 삶을 지탱해 줄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남은 여성들의 모습은 큰 울림을 전한다. 한때는 전부였던 연인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일기 내용을 보고 떠나간 상황에서 괴로움 대신 살아남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내비친 마지막 일기에 이르기까지. 책에서 시선을 쉽게 거둘 수 없다.

부산일보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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