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시작인가 싶더니 벌써 1월이 다 지나간다. 희망과 다짐으로 일어선 하루가, 하루를 더하고 있다. 신용목 시인의 말처럼 '천천히 해를 따라 걸으며 늙어가는 무리가 있다면' 그게 우리일까? 꿈의 정거장인 밤을 지나면 영원한 사랑의 공동체로 걸어가서 지난밤을 확인하는 게 우리일까를 생각한다.

콘크리트 둥지를 지나 쏘아지는 사선에 서면, 아스팔트바닥에 그려진 화살을 따라 우리는 날아간다. 세상은 과녁 아닌 곳이 없어서 쓸데없이 쏘아올린 살대가 방향을 잃고 부메랑처럼 돌아오기도 한다. 달리다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라는 명을 신으로부터 받았다. 지난밤 절망에 빠졌던 해가 빠른 걸음으로 떠오르고 있다.

꽃피는 정원을 지나고, 불판 같이 달아오르는 대지를 건너서 아름다운 빛깔로 익어가는 계절을 찾아간다. 한 순간도 머물 수 없는 폭약 같은 시간의 정령을 따라 가는 것이다. 내 몸을 뚫고 나온 한 끼의 식사는 고운 쟁반에 담겨지기를 원하고 있다. 문득,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지구의 거대한 창살로 보여도 그곳을 뚫고 나가야 하는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인 것이다.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를 보았다. 항간에 떠도는 말로 이 영화를 안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받고 있다. 80년대를 대표한 록그룹 퀸을 조명한 영화인데도 지금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열정적으로 살다간 한 인간을 조명하면서 다큐도 아니면서 다큐처럼, 영화의 재미가 더해지고 폭발적인 관객으로 상업적인 성공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디 머큐리의 파란만장하게 그려지는 인생여정이 상업적인 것에서는 독립하지 못했지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퀸의 음악을 한마디로 정의 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생산해왔고, 보헤미안 랩소디에서는 오페라 영역까지 소화해 내고 있기에 그의 음악적 다양성과 복합성,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정신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보헤미안은 프랑스인들이 동유럽 떠돌아다니는 집시들을 보헤미안이라 불렀는데, 이후 보헤미안의 뜻은 사회적 관습이나 규율을 따르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분방한 사람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부르는 미친 노래란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랩소디는 흔히 광시곡이라 하지만 이는 일본식 한자 표기 음의 잘못 전달된 것으로 이해가 된다.

우리 모두는 영혼이 자유로운 노래를 부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요구하는 노래는 너무 침울하게 흐르고 있다. 보헤미안처럼 떠돌아다닐 수도 없으면서 떠돌아다니기를 강요받고 있다. 젊은이들이 꿈의 정원을 지나서 찬란한 대지로 가기에는 다리가 너무 짧은 짐승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과녁이 많아도, 고운 빛깔로 익어가는 계절로 가서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 항만노동자에서 자기 생을 바꾼 프레디 머큐리 같은 꿈을 꾸기엔 너무 벅찬 현실이 눈앞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꿀 수 없는 것에, 바꾸어야 하는 것에 대한 동경인 것이다. 시대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위대한 사상은 노래처럼 죽고 말았지만 우리는 멈출 수 없는 노래를 다시 불러야 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서 사랑을 찾아간다. 노래를 부르면서 자유로운 영혼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금방 늙어버리고 서쪽 하늘에 해를 건다 해도, 우리를 주인으로 섬기는 꿈의 정원을 찾아가야 한다. 과녁 없는 곳으로 날린 화살이 저녁을 물고 온다 해도 이것은 하나의 헛된 꿈을 자르러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청춘은, 열정이란 불을 켜고 사랑이라는 녹지 않는 막대사탕을 물고 간다. 밤하늘 별들이 어두운 곳을 한 바퀴 돌면 새벽이 다시 열리듯이, 지상에 찍어놓은 신들의 발자국을 하나씩 들추며 간다. 우리는 깨부수고 개척하고 싶은 세상이 있다. 다 함께 손 흔들며 소리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지나간 자리가 곧 길이 된다고 믿고 싶은, 우리 모두는 영혼이 자유로운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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