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볕이 대지에 콕콕 박히는 나른한 오후, 벤치에 앉은 한 노인이 지그시 눈을 감고 햇살에 몸을 녹인다. 녹슨 철로길을 따라 걷던 사람들은 진영역사에 켜켜이 쌓인 옛 기억을 들춰보며 애틋한 추억에 잠긴다. 산책하는 주민들과 놀이공원에서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모두 '진영 소도읍 재활사업'으로 공원화된 옛 진영역에서 웃음꽃을 활짝 피워낸다.

소도읍 재활사업은 옛 진영역사와 폐선부지를 활용해 시민 휴식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낙후된 구도심과 신도심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추진됐다. 현재 옛 진영역 일원은 철도박물관과 성냥전시장, 기관차 북카페, 종합물놀이장, 휴식 공간 등으로 조성돼 있다. <김해뉴스>는 지난 24일 철도박물관 이하영 학예사와 함께 공원으로 탈바꿈한 옛 진영역을 둘러봤다.


 

▲ 철도박물관 오른편에 실제 기관차와 열차 두 량을 전시해 북카페로 내부를 꾸며놨다. 이곳은 방문객의 휴식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배미진 기자

 

역사 리모델링 철도박물관 조성
기관사 체험·승차권 전시 등 다채
대한민국 철도 역사 한눈에 담겨

김해 1호 공장 기념 ‘성냥전시관’
기관차·열차 활용 북카페 마련
주민들 “향수 어린 장소 반가워”




■일제강점기 아픔 담긴 공간
철도박물관은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를 담고있다. 1899년 개통한 제물포~노량진 간 33㎞의 경인선은 나라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견인했다. 당시 튼튼한 두 다리와 가마, 우마차가 이동수단의 전부였던 시기에 등장한 철도는 한마디로 '신(新)문명'이었다. 12시간이 소요되던 서울~인천은 단 1시간 40분 만에 도착했고 열흘 넘게 걸리던 서울~부산은 11시간이면 목적지에 닿았다. 경인선 개통을 시작으로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1914년 호남선, 경원선 등 주요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뤄진 이동혁명은 곧 생활혁명으로 이어졌다.
 
1904년 일제는 러·일 전쟁을 앞두고 병참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경부선의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지선철도 부설을 원했다. 사업가 박기종(1839~1907)은 이미 1902년에 영남지선 철도회사를 설립해 삼랑진~마산 구간의 철도부설 허가를 얻은 상태였지만 일제에게 강탈당하고 말았다. 마산선은 1968년 부산에서 광주까지 모든 선로가 개통되며 경전선의 일부로 흡수됐다. 경전선은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를 이어주는 철도로써 약 300㎞에 달하는 동서횡단선이다.
 
진영역은 대한제국 말기인 1905년, 일본이 군수품을 나르기 위한 군용철도로 만들어졌다. 1939년 10월에는 일본인 역장이 배치됐고 1940년부터 일반운수 영업을 개시했다. 1943년에 현재의 진영역사가 개축됐는데 당시 여객 승강장과 직원 14명을 갖추고 있었다. 105년 역사를 자랑한 진영역은 2010년 경전선 복선전철화로 폐역됐다.
 
이 학예사는 "부산~마산은 일제가 곡물을 수탈해 내려오는 구간이었으며 진영역은 물자가 한 데 모이는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단감 묘목도 이때 전국적으로 팔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 옛 진영역사를 리모델링한 철도박물관 전경.
▲ 과거와 현재의 진영 모습을 형상화한 철도 디오라마

  

■"그땐 그랬지" 옛 향수 가득
철도박물관 제1전시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합실이 나타난다. 어머니와 아들을 형상화한 모형은 의자에 앉아 지역 특산품인 진영단감을 꺼내 나눠먹고 있다. 어머니 발밑에 잘 익은 단감이 가득 담긴 소쿠리가 있는 걸 보니 시장에 가지고 나가 팔 생각인가 보다. 마주 보이는 진영역 열차 시간표는 방문객을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1911년 마산포선, 1935년 경전남부선, 1960년 진주선, 1995년 경전선 열차 시간표는 오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상징물이다. 매표소 옆에는 인자한 미소를 지닌 역무원이 개표가위를 들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진영역의 역사는 박물관 벽면에 설치된 화면에서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 공간 내부로 들어가면 기관사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이 학예사는 "실제로 무궁화열차 뒤편에서 찍은 영상을 재생한다. 속도조절 레버를 조작하면 마치 기관사가 된 마냥 생생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은 물품도 전시됐다. 손 때 묻은 각종 승차권과 역무원 유니폼, 수·소화물 영수증 등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져 더 정겹다. 이 학예사는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것만 수천여 개가 넘는다"고 귀띔했다.
 
제2전시실에는 옛 진영과 현 시가지를 형상화한 철도 디오라마(축소 모형)이 설치돼 있다. 버튼을 누르면 기차모형이 레일을 돈다. 근현대문화 유물과 옛 진영 지역의 거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김해시 도시계획과 관계자는 "현재 철도박물관은 완공된 상태지만 관리·이관 문제로 오는 2월 초에 문을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 옛 진영역 열차 내부 모습을 재현한 모습.



■김해시민 휴식공간으로
박물관 오른편에는 실제 기관차와 객차 두 량이 전시돼 있다. 객실 내부는 아늑하면서도 깔끔한 북카페로 조성됐다. 카페를 나오면 성냥전시관이 마주보인다. 김해지역 1호 공장이자 전국의 마지막 성냥공장이었던 '경남산업공사'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1948년 진영읍 진영리 275-30에 세워진 경남산업공사는 1970년대만 하더라도 직원 수 300여 명에 육박할 만큼 규모가 컸다. 하지만 1980년대 1회용 가스라이터가 보급되면서 성냥 주문량은 급속도로 줄어 성냥산업 전체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거기에다 경남산업공사 부지 중 일부는 당시 김해시가 추진한 '진영소도읍가꾸기' 사업에 편입되면서 성냥공장은 설립 70년 만에 가동을 중단했다.
 
성냥전시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사각통 성냥갑 제작기계와 절단기계, 성냥개비 정리기계와 더불어 '기린표', '신흥표' 등 각종 성냥갑이 전시돼 아련한 추억을 선사한다.

 

▲ 성냥역사와 제작기계, 성냥갑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성냥전시관.
▲ 철도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진영역사 관련 기록품.


 
옛 진영역 일원은 다목적구장과 테니스장, 운동시설과 300석 규모의 공연장이 설치돼 있다. 공원 전체 3만 2873㎡ 내에 느티나무 숲, 이팝나무 군락과 산책로를 조성해 주민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주민 백경희(67) 씨는 "옛 진영역에 가면 대한민국 어디든 다 갈 수 있을 만큼 교통이 좋았다"며 엄지를 치켜 세웠다. 그는 "앞으로도 더 많은 시민이 찾아와 옛 진영역을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학예사는 "옛 진영역 일원이 청소년들에게는 흥미로운 문화공간이자 어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역사적 장소로 활용됐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김해뉴스 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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