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나무는 매일 천천히 걷는다. 그 아래로 내가 걸어가면 이름 모르는 나무가 말을 걸어온다. 이 거리를 한 번도 걸어 본적 없는 것처럼 걸어간다. 무더운 날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나무의 이야기도 신선해 진다. 내 삶의 앞장을 덮어두고 뒷장을 열어본다.

깊어지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무의 속살을 타고 건너온다. 다 읽어 보지 못한 책처럼 다음 장이 더 궁금해지는 것도 나에게 전해지는 나무의 이야기가 신기하고 신비롭기 때문이다.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했다. 이것은 풀꽃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름 없이 걸어가는 것에 대하여 오래오래 생각한다.

나는 너를 알기 위하여 다가간다. 이번 생은 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긴 여정 같은 것이다. 그러나 흔적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가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 각자의 생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비밀스런 흔적과 아름다운 냄새를 가진 출입문을 열어 보기란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자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랑을 찾아가는 시간의 수집가처럼 침묵의 나무 아래로 걸어간다.

내가 걸어가는 방식은 느림에 있다. 내가 도무지 사랑하지 못할 것에도 오랜 관심으로 지켜본다. 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나간다. 그 종소리가 멀리 퍼져 가는 것은 종을 세게 쳐서가 아니다. 그 소리는 은은하게 느린 걸음으로 펴져가기 때문이다. 빨리만 건너편에 도달하고자 했다면, 그 종소리는 쉽게 깨져 버렸을 것이다. 종을 치는 사람도 급하게 쳤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 사는 것의 진정한 이야기를 듣는다. 우곡사 은행나무는 500년을 걸었다. 절 밖에서 절 안으로 걸었다. 언덕을 오르다가, 넘다가 벼락을 맞았다.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벼락으로 자기 속을 다 태우고 비워서 껍데기만 겨우 두르고 서있다. 숯검정의 은행나무는 살아서, 죽은 자신의 후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텅 빈 그 속에는 별빛 만평, 구름 만평을 들여 놓았다. 종일 화상연고처럼 떨어지는 염불을 바르면서 은행나무 목발을 짚고 500년을 더 걸어 갈 것이다.

목발로 짚어가는 생이야 말로 더디고 아프게 가는 것이다. 칸칸이 나눈 죽음의 일생을 일찌감치 보면서 나무는 간다. 나도 끝까지 걸어서 나간다. 한 발짝씩 더 가고 덜 가는 생의 의미를 새기면서 묵묵히 서서 가는 나무를 생각한다.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행성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나무의 장대를 빌려 짚고 나는 천천히 앞으로 간다.

사람이 죽어서 관을 짜는 것도 나무의 걸음으로 눕기 위한 것이다. 나무속을 파내고 드러누워 나무의 걸음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나무의 속을 파내면 관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악기가 되기도 한다. 속을 파낸 악기로 음악을 연주 한다면, 아름다운 나무의 소리로 사람을 위무하는 것이다.

나무의 침묵 속으로 내 목소리를 걸어두고 간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너무 짧은 시간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너무 멀리 달아났다. 지상에서 빛나던 별들이 나무에게로 타고 오른다. 나무는 지상의 어느 곳을 아주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아간다.  나무라고 다 걸음을 내는 것은 아니다. 불이 지나가서 몸을 열어 보인 우곡사 은행나무 목발로는 천년을 더 걸어가겠다. 수만 볼트 벼락이 내려쳐도 아주 천천히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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