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가까워지고 있어, 생각해 본 적이 있니?우리는 형제처럼 가까울 수 있다는 걸…미래는 아직 모르지만 난 모든 곳에서 느낄 수 있어변화의 바람이 부는 걸팝음악이 거리를 관통하던 70·80년대를 경험한 장년층에게 독일 출신 록 밴드 스콜피언스는 꽤 친근한 편이다. 그들이 부른 곡 중에 'Wind of Change'가 있는데, 가사 내용처럼 변화의 바람을 노래한다. 이 곡이 유명해진 것은 음악적 완성도도 있지만 무엇보다 독일 통일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1989년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직장인이라면 점심 메뉴 같은 소소한 것에서부터 사표를 내고 창업 전선에 뛰어들 것인가 하는 고민까지, 기업가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제품 개발과 투자 결정을 앞두고 머리를 싸 맨다.지방선거 출마를 앞둔 정치인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당선을 위해선 어느 정당을 택해야 할지, 선거 전략은 어떻게 짜야할 지를 선택해야 한다. 유권자도 선택의 갈림길에 서기는 마찬가지다. 6·13 선거에서 어느 후보를 찍어야 할지, 소속 정당이 먼저인지, 후보의 인물과 경쟁력이 먼저인지 선택이 필요하다.우리의 삶은 그
1938년 9월 29~30일. 독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4개국 정상 회담'이 열렸다. 불과 20여 년 전에 벌어진 1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소집한 회담이었다. 이 자리에서 독일의 히틀러는 "체코 슈데테란트 지역을 차지하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가 동의하면서 프랑스를 설득했다. "전쟁을 피할 수 있으면 체코 땅쯤이야 누가 가져도 상관이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불과 1년 뒤, 독일이 슈데테란트 지역을 거점으로 유럽에서만
미투 운동이 평창동계올림픽 열기를 뚫고 연일 이슈가 되었다. 젊은이들의 꿈과 이를 이루려는 간절함을 성적 착취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분이 컸다. 제자 또는 후배로 호명되어야 할 이들이 '더러운 욕망'의 배출을 위한 성적 대상으로 호명되어 왔다. 그런 행태들이 드러나면서 사회적으로 쌓았던 명망은 한 순간에 추락하고, 공동체 왕국은 몰락했으며, 내부 구성원들 간에는 배신과 한탄과 발뺌의 장면들이 이어졌다.이윤택은 그 와중에 '18년 관행'이나 '성폭행은 없었다'라는 법정 대비 변명을 했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가장 놀라고 부러워하는 것은 대중교통 체계이다. 우선 편리하다. 전철과 시내버스 간의 무료 환승 제도가 있어 추가 비용 없이 목적지로 갈 수 있다. 택시도 쉽게 탈 수 있고 기사들은 대체로 친절한 편이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이 놀라는 5가지' 등에 대중교통이 항상 1, 2위에 오르는 이유이다. 하지만 김해는 예외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시내버스 노선이 복잡하고 배차 간격이 길다. 마지못해 택시를 탈려면 어디에 숨었는 지 보이지도 않는다. 콜서비스를 이용해야 하고, 콜 비용은 물론 이용자 부담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이후 개최한 대형 이벤트라면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에 이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88올림픽은 폐쇄적인 군사 정권 시대를 마감하고 국제화 시대로 나아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념이 달랐던 동구권 나라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과거 반쪽 올림픽들을 극복한 데 이어 '북방 외교'를 단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로부터 14년 후에 열린 '2002년 월드컵'. 세계가 깜짝 놀
장률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 에는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 14명이 등장한다. 이들이 연기를 맡아 드라마를 찍은 것은 아니다. 카메라는 개개인이 작업장에서 일하는 모습이나 숙소 생활 등을 멀찍이서 바라볼 뿐이다. 그런 만큼 대사가 드문데, 감독은 이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한국에서 꾼 꿈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은 무엇입니까?"동티모르에서 온 아우구스티노는 며칠씩이나 고향 꿈을 꾸었다. 그때마다 건강이 악화돼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난다. 베트남에서 온 호망 타인은 아빠가 회초리로 때려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방글라데시
봉황대(鳳凰臺)는 김해시 중심가, 해반천 옆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구릉이다. 회현리 패총과 함께 국가사적 제2호인 '봉황동 유적'으로 지정돼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가락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황세 장군과 출여의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설화의 본향(本鄕)이기도 하다. 봉황대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 1870년 김해부사로 부임한 정현석이 이 일대가 봉황이 날개를 단 것 같다하여 '봉황대'라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 같으면 김해시장, 그것도 서울에서 내
"국제무대에서 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왔습니다.” 미국에서 연수 교육을 받던 시절, 가깝게 지내던 한국 유학생이 했던 말이다. 글로벌 경제 시대에 탄탄한 어학 실력을 갖추는 것은 필수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학생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미국에서 배운 선진 기술을 일본 경제에 적용하고 싶습니다." 리모델링에 강한 일본 경제가 요구하는 인재상을 보여주는 듯한 발언이었다. 이에 반해 중국 유학생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중국 문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얼마 전, 김해뉴스 편장국장 직책을 맡은 직후부터 끊임없이 생각했다. 생각은 이어졌고, 벌써 20여 일이 흘렀다. 물론 신문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는 고민도 있었지만 생각의 주된 흐름은 김해뉴스의 과거, 현재, 미래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시민들에게 비춰진 김해뉴스의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언론이 되어야 할까라는 생각이었던 셈이다. 우선 김해뉴스의 출생신고서상 정체성을 짚어보자. 김해뉴스는 국내 최고 수준의 언론 전통을 지닌 부산일보가 2010년 12월 김해에 설립한 주간 신문사. 최근 창간 7돌을 넘겼다. 이 대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