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신선의 산 칠점이 푸르고/거문고 속 희고 둥근 달 밝게 빛나네 세상에 옥섬섬의 손이 없었다면/누가 태고의 정을 타보려 하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초선대와 칠점산의 전설과 풍광을 읊은 시들을 감상하였다. 마지막으로 김해 제일의 풍광을 떠나는 아쉬움을 칠점산과 관련된 기생(妓生) 이야기로 풀어보자 고려 말 전녹생(田祿生:1318~1375)은 계림(鷄林:
칠점산은 김해 사람들과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초선대(招仙臺)와 함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함께 준 최고의 경관이었기에 읊은 시도 무척 많다. 지난 호에 이어서 시대별로 시들을 감상하면서 옛 칠점산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도록 하자. 허적(1563~1641)은 40구절이나 되는 장시를 지어 당시의 칠점산을 상세히 읊고 있다. 그는 시의 서문에 '(칠점산은) 양산
초선대(招仙臺)에서 거등왕(居登王)과 만나 음악을 즐기고 바둑을 두었던 참시선인( 始仙人)은 바다 건너 초선대의 동남쪽에 있던 칠점산(七點山)에서 거문고를 타며 살았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옛날 거등왕 시대에 참시선인이 배를 타고 건넜던 초선대와 칠점산 사이에 큰 모래섬이 형성되어 이제는 걸어갈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이상
대성동(大成洞), 서상동(西上洞), 동상동(東上洞), 회현동(會峴洞), 부원동(府院洞)에 걸쳐 있던 가락국의 옛 성과 궁궐을 뒤로 하고 부원 경전철역까지 내려가다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길의 왼편으로는 김해 행정의 중심 김해시청이 있다. 여기에서 경전철을 따라 부산 방향으로 나아간다. 김해시청역, 인제대학역을 지나고 김해대학역 못 미쳐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구지봉과 허왕후의 능 사이를 이어둔 육교를 뒤로 하고 김해시청 등이 있는 김해의 도심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간다. 이 길은 경전철이 지나가는 저 너머 내외동(內外洞)이나 인제대학교 쪽의 마을들과는 달리 말끔하지도 않고 정리정돈도 되지 않은 모습이다. 작은 주택들이 길가를 따라 이어져 있고, 이따금은 과거에 가게였던 곳이 먼지가 쌓인 채로 문이 닫혀 있기도
앞에서 우리는 이광사의 시를 통해 허왕후가 바다를 건너 김수로왕을 만나는 장면과 이후 가락국의 기초를 이루어 나갔던 전체의 상황을 감상했다. 이제는 부분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와 이를 읊은 시들을 보기로 하자. 조선 후기의 시인 윤기(尹:1741∼1826)는 허왕후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김수로왕과 인연을 맺은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뒤 이를
지금까지 가락국의 상징이자 김해의 상징인 김수로왕의 영원한 안식처인 능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그의 왕비이자 김해 허(許)씨의 선조인 허왕후의 능으로 가본다. 에는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이라는 제목으로 현재 허왕후릉 앞에 있는 파사탑 또는 진풍탑(鎭風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김해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전 회에서 소개한 정희량 보다 약 100년 후 김해를 찾은 홍위(洪瑋:1559~1624)의 시를 보자. 시의 제목은 '김해 수로왕릉을 지나면서 짓는다(過金海首露王陵口占)'이다. 제목에서의 '구점(口占)'은 '구호(口號)'와 함께 시간을 두고 짓고 다듬는 것이 아닌 즉흥시를 말한다. 따라서 이 시는 그가 김해를 지나는 길에 잠시 머물러 즉흥적으로
'구지봉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고인돌을 지나 봉우리의 남쪽 끝으로 나아가 전망을 위해 마련된 마루에서 앞을 바라본다. '가운데로는 물이 흐르고 그 앞이 그 옛날 가락국 시대에는 바다였다고 하니, 그 시대 사람들 삶의 터전으로는 저만한 곳도 없겠구나'라고 생각할 만한 평평한 벌판과 야트막한 언덕들이 보인다. 이곳은 부산~김해경전철의 박물관역&midd
에는 구지봉을 '부(府)의 북쪽 5리에 있다. 분산(盆山) 중턱으로부터 서쪽으로 거북이처럼 엎드려 있으니, 수로왕(首露王)이 탄강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분산은 성(城)이 복원되어 있어, 김해시청을 비롯한 김해 중심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 분산이 김해 시내로 미끄러져 가다 허왕후 능을 지나 끝닿는 곳에 구지봉이
김해는 낙동강이 주는 넉넉함과 바다가 열어주는 국제 지향적 역동성의 바탕 위에 자리 잡았다. 이 자리에서 가야 시대를 열고 강력한 맹주로 위용을 떨치던 가락국(駕洛國)은 김해의 상징이 되었다. 김해와 가락국의 관계는 김해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외지인들에게 있어서도 1:1의 공식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는 경주(慶州)가 신라와, 공주(公州)가 백제와, 평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