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화단에 이름 모를 싹이 자주 돋아난다. 설란 화분에도 그런 풀이 자라고 있었다. 잎새를 보아하니 난초 못지않게 참해서 선뜻 뽑아낼 수 없었다. 너도 참하게 자라 보라며 빈 화분에 옮겨 심었다.설란 속에서 떡하니 더부살이하던 새싹은 타래난초였다. 마디게 자라던 타래난초가 제 키보다 긴 꽃대를 올렸다. 보기에는 작고 여리나 자세는 꼿꼿하고 의연하다. 그 자태를 찬찬히 보려면 경배하듯 몸을 낮추어야 한다. 타래난초가 후대를 남기는 비법이 절묘하다. 단단히 받쳐 든 이파리 속에 줄기를 세워놓고 긴 나선형으로 돌려가며 매듭 모양으로
계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름 속에 있지만 난 아직도 추운 겨울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다. 이 스산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찬 공기에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다. 어린 시절 들판에 나가 소 풀을 먹일 때, 소는 어디든 마음대로 가지만 사람인 나는 한낱 미물인 소만 바라보고 움직이지 못하는 그때의 내가 생각난다. 소만 바라보며 소가 어디 가는지 눈앞에서 사라지면 나 역시 깜깜한 어둠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배가 부른 소는 이동하는 반경이 줄어든다. 그때쯤이면 석양이 붉은색으로 물든다."이랴 이랴"고삐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삶이 때때로 힘겹다고 느껴지는가? 혹시, 운명이란 것에 희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사랑에 대해서도 그랬을 것이고, 일에 대해서도 그랬을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그 사람을 덜 사랑해서도 아니었을 것이고, 또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운이 맞지 않아서, 혹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과 맞지 않아서 실패한 경우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그런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그저 주저앉아 한숨만 쉬고 있는가? 시냇가에 나가보면 매끄러운 조약돌이 많이 있다.
병원의 입원실은 무작위로 선출된 타자들이 약속도 없이 만나는 장소인 것 같다. 병실에서의 만남은 우연의 공간이고, 무의미하며 지극히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친밀한 공간도 없으리라. 6인 병실이라는 열 평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열두 명이 함께 자고 먹고 민낯을 보인다. 좁은 냉장고를 조목조목 나누어 쓰느라 불편해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동병상련의 정을 나눈다. 방문객들이 가져온 음식도 친절히 나눈다. 이렇던 사람들이 밤에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티비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과 불을 끄고 일찍 수면을 취
오늘도 나는 연기를 했다. 거짓웃음, 거짓의 말, 거짓 행동을 스스럼없이 꾸며내며 다른 사람의 대본을 마치 내 대본인양 외우고 다녔다.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순간만 모면하려 적당히 둘러대는 데만 급급했다. 거울을 본다. 예전에 비해 참 많이 변했다는 건 단번에 느껴지지만 어떻게 변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보이는 곳 말고 가슴 안쪽은 더더군다나. 분칠을 벗겨내고, 여기저기 남아있는 자국을 지워낸다고는 했지만 아직도 내 얼굴 어딘가에는 깜박 잊고 지우지 못한 분장의 찌꺼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자국 그대로
아래채에 묶어 두었던 꾸러미를 풀었다. 세상에, 삼십 년이 지난 사진들이 그 속에서 나왔다. 시민회관에서 한 들꽃 전시회 사진들이다. 정성껏 키워서 분에 올려 전시장으로 갔었지만 들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진열대에 올려 보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포자를 단 아름다운 이끼 사진, 전시는 못할지언정 사진으로만 남기겠다고 세 컷을 찍어서 넣어둔 것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보물 같은 기록 사진들이다. 어쩜 이리도 예쁘게 키웠을까, 그 옛날 젊은 감각과 패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 당시엔 잊힌 우리의 들꽃만을 전시해도 부족한 공간이었다.
요즘 고독사가 사회문제로 심각하다. 영화 「스틸라이프」는 홀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소재로 한 영화다. 런던 케닝턴 구청에 근무하는 주인공 존 메이는 나 홀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위해 장례를 치러주고, 고독사한 사람들의 지인들을 찾아내어 장례식에 초대를 하는 일을 한다. 혼자 사는 주인공 존 메이는 자신의 일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나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반면 그의 상사는 무연고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일을 예산 낭비라고 말한다. 그의 태도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
장마철이다. 비를 머금은 경운산 자락이 백자 빛 안개로 자욱하다. 한동안 산허리를 감싸 안고 흐느적이던 안개는 골짜기를 가르는 아침햇살에게 서서히 자리를 비껴준다. 길게 여운을 남기며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안개 속에 초록의 나무들은 더욱 선명해진다. 오랜 기억의 한 조각이 몽롱하게 피어오른다. 아버지는 마흔한 살에 드디어 아들을 보았다. 줄줄이 딸 다섯을 낳고 기어이 만나고야 만 아들이다. 욕심내어 두 아들을 원했지만 또 여섯 째 딸을 낳은 뒤 더 이상 자식 욕심을 버렸다. 다섯째 딸인 나를 천덕꾸러기로 만들지 않게 해 준 고마운
우리는 일상에서 바쁘게 생활을 하다 보니 이웃도 모른 채 지나기가 일쑤다. 오다가다 이웃을 만나면 형식적으로 고개만 까딱거리기도 하고 지인을 만나면 "언제 식사 한번 해요"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쉼, 우리의 로망이고 많은 사람은 쉬고 싶다고 말은 하는데 정작, 이 쉼을 제대로 활용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군인이 되었지만, 입대 전 아들이 중·고교 시절에 바쁜 와중에도 얼굴 마주 보는 날은 주말 아침 식탁에 앉아 밥을 같이 먹었다. 짬짬이 주중의 일정을 자연스럽게 공유를 하며 서로 시간이 맞는 날은 무조건 여행을 떠
백문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백 번 듣는 것은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한서'(漢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나아간 것이 '백견 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으로 백 번 보는 것은 한 번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백행 불여일교'(百行 不如一敎)로 백 번 행하는 것은 한 번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르칠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음으로 그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도 우연하게 이런 가르침의 기회가 왔다. 지역의 도서관에서 시민을
여행은 집을 벗어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다. 지인들과 1박2일 여행으로 집을 떠나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1박2일의 시간을 공유한다. 첫 날 일정을 마치고 밤늦도록 이어진 이야기와 음주 가무로 평소보다 늦은 시간까지 정신을 근근이 지켜내다 다음날 일정을 생각해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겨우 잠에 빠지기 시작한 이른 새벽, 모닝콜 음악이 수면을 방해하며 정신을 깨운다. 모닝콜의 주인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잠시 뒤 한번 더 음악이 흐른다. 그의 곤한 잠을 위해 대신 모닝콜을 꺼주고 싶다.
그에게는 삼십칠 년째 쓰고 있는 도장이 있습니다. 인감이자 통장용 도장으로도 사랑받는 도장입니다. 주민 센터 직원은 이제 이 도장의 귀퉁이가 너무 많이 떨어져 나가서 인감으로는 쓸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말에 마치 땅이 꺼지는 듯 심한 상실감이 느껴졌습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죽도시장에서 보기 좋은 놈으로 하나 골라 새로 새겼습니다. 자식을 잃고 새 양자 들인 듯 왜 이리 머릿속이 복잡하던지. 도장 하나가 이럴진대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은 어땠을지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어미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가난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