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한눈에 봐도 연로하고 병색이 짙었다. 굽은 등에 팔다리를 약간 벌려 걷는 모습이 커다란 거미 같았다. 파마기 없어진 짧은 머리카락은 끄트머리만 까맸고 뒤통수가 눌린 것으로 보아 자주 누워 있는가 싶었다.길에서 만나면 허리 굽히는 정도로 어른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땅을 보고 걷던 노인은 굽은 허리를 힘겹게 펴서 나를 올려보곤 했다. 희미해진 눈썹 문신이 그늘이 드리웠고 회백색 눈이 나를 응시하면 섬뜩했다.거미할머니가 기운이 나면 마실 나오는 날이다. 늦은 밤에도 다닐 때가 있다. 차가 다니는 어둑한 골목에서 비척거리다 몸이
김해시에서 주관하는 여성주간 행사에 갔었다.올해부터 명칭을 양성평등주간이라고 바꿨다한다. 하지만 여느 해처럼 설치해놓은 여러 부스에 남성들의 단체는 없었다. 여성단체들이 건강이나 가정폭력, 바리스타, 출산장려 등을 홍보하는 리플릿과 선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특기로 배울 수 있는 것을 체험하는 부스를 운영하였다. 비즈공예, 캘리그라피, 석고방향제 등이었다. 두루 다니면서 안면 있는 분들과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부채나 물티슈를 받기도 하고 무료로 제공되는 시원한 음료도 마셨다.체험부스는 인기가 높아 미리 신청을 하고 기
한 해가 끝나간다. 아쉬움에 떨고 있는 마지막 달력마저 스산하다. 그 또한 며칠이 지나면 새 달력으로 바뀌게 된다. 되돌아보니 낡은 달력이 붙어있던 추억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낯익은 눈빛과 웃음이 깔린 모퉁이마다 반가운 소식과 슬픈 소식이 머물고 있다. 세월이 그리움이 되어 여울로 흐르고 있다.나뭇가지에는 몇 알의 홍시가 매달려 있다. 인심 좋은 주인의 배려가 까치밥으로 남아 간밤에 얼었다가 햇살이 퍼지면 녹기를 반복한다. 12월의 언저리가 거리에 나부낀다. 아직 늦가을의 기억이 멀어지지도 않았는데 들녘은 허허로움으로 가
뜨거운 여름 한낮, 후텁지근한 공기를 가르며 쏟아져 나오는 매미의 울음이 청아하다.우는 것일까, 노래하는 것일까, 수많은 개체가 어울려 한꺼번에 내는 저 소리는 분명 우렁찬 합창 소리가 틀림없다. 오래된 팽나무 군락지 옆에 있는 우리 집은 여름 한 철 매미의 노래로 귀가 호강을 하다못해 몸살이 날 지경이다. 텃밭의 채소들도 화단의 꽃들도 노래를 듣고 자라고 꽃피운다. 만물이 지쳐 늘어진 계절에 매미는 저 혼자 활기차고 즐겁다.17년 동안 땅속에서 살다가 번데기의 형태로 지상으로 올라온 후, 비로소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된다는 매미,
비 오는 날 먹는 구수한 수제비는 별미 중 별미다. 잘 우려 낸 육수에 제철감자와 애호박을 넣어 끓여내면 진수성찬 이 부럽지 않을 맛을 낸다.내가 여덟 살 쯤 되었을 무렵 여름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호롱불 아래 아이들은 앉아 일기를 쓰고 엄마는 다음날 아침 반찬거리를 준비하곤 했었다. 엄마가 감자를 닳은 숟가락으로 긁는걸 보니 내일아침 반찬이 감자볶음 인가보다 생각하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닭장에서아침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여 밥상 앞에 앉았는데 뽀얀 이밥대신 수제비가 밥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낯설은 느낌에
창호지 격자문으로 인테리어를 한 고급 한식당에서 창호지문의 아름다움을 본다. 창호지가 주는 아우라에 식당의 품격을 한 등급 올려본다. 음식 또한 과격하지 않고 정갈할 것 같다. 한식당의 격과 잘 어우러진다. 우리 것의 아름다움이 자꾸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다.지금은 유리나 나무로 된 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내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집집마다 대부분 창호지로 방문을 발랐다. 창호지문에서 새어나오는 정감어린 불빛의 은근한 멋이 그립다.소녀시절, 창호지문에서 받았던 작은 홀림이 지금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밤이 되어 하나
간 밤, 내린 여름비에 신록의 나뭇잎들이 떨어진 아침 길은 유난히 쓸쓸한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총총 바쁘게 걸음을 옮기지만 오늘따라 문득 주변의 사물들에 눈이 간다. 내게 말을 걸어주는 듯 부는 바람 한 끝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조심스레 손으로 받아보며 '떨어지다'를 중얼거려본다.떨어지다는 결코 좋은 느낌, 좋은 어감은 아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결과에 대한 아쉬움에 후회가 몰려든다. 면접에 떨어지면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경연에 떨어지면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왜?'라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인생을
"저 어린것이 조막만 한 손으로 돈 벌러 다닌다네."아버지는 마실 온 동네 사람들을 앞에 두고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아홉이었다. 잠깐 다니러 간 고향 집에서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물론 내가 덩치도, 키도 작지만 그렇다고 '저 어린것' 이란 소릴 듣기엔 어림없는 나이었다. 아버지에게 막내딸은 나이가 많건 적건 그저 저 어린것으로 보였을 것이다.얼마 전, 포털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내가 살다 살다 예비군을 태워다 줄지는 몰랐다는 내용의 글이다. 그 밑에
천명에는 대략 세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첫째는 하늘로부터 받은 목숨이고, 둘째는 타고난 운명이며, 셋째는 하늘의 명령이다. 이 뜻을 두고 볼 때 두루 사람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하늘로부터 받은 목숨이라고 했을 때 죽음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죽음은 삶에서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부분으로 어떻게 아름답게 살다가 죽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삶에서 후회하지 않을 죽음을 하나하나 준비해야 된다. 후회 없이 죽을 때 우리는 천명을 누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할 수 있다. 천명을 누리고 눈을 감는 사람이 얼
우리 모두는 시간 여행자들이다. 가끔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여행지의 낯선 풍경에 허기진 삶을 충전하고 새로운 도전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행복해지려는 인간의 욕망과는 달리 행복과 고통은 늘 함께 따라 다닌다.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모처럼 여행의 낭만과 삶의 여유를 만끽하려던 여행자들이 한순간에 거대 유람선의 횡포에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행여나 구조소식이 올까 가슴을 졸였지만 알프스의 차가운 물은 행복을 꿈꾸며 떠난 여행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말았다.사람들은 미쳐 타인 슬픔과 기쁨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
밤비가 타닥타닥 내리더니 하늘이 말갛게 아침을 열었다. 손을 뻗어 그저께 받아 놓은 책을 끌어당겼다. 한 시간여 글을 쫓아가던 시력이 기운을 잃는다. 애면 안경 렌즈를 꼼꼼히 닦지만 소용없다. 비 내린 후의 하늘빛이 아까워 그랬던가. 종일 책과 씨름을 했다.나만의 넉넉한 시간은 눈이 나빠져서야 찾아왔다. 시력이 좋았을 때는 잠은 왜 그리 많았는지 아이들에게 동화책 몇 권 읽어 주다가도 금세 자몽했다. 글을 빨리 읽는 편이지만 기억력이 나빠져서인지 앞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그래도 책을 읽는 시간에는 만사를 잊어서 좋다. 새로운
밤은 낭만적이다. 해질 무렵이면 한적한 곳에서 노을을 감상하는 버릇이 있다. 한풀 꺾이는 시간이 되면 모든 것에 진실해진다. 지쳐있는 삶을 다독이는 어머니 품같은 밤이 되면 속상함도 서러움도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로에 눅눅해진 거리에는 작은 불빛들이 하나씩 켜진다. 그리움과 아픔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즐길 줄 알아서 인지 늘 나만의 시간은 밤에 이루어진다.불빛을 좋아하는 족속들이 몰려오는 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내겐 낭만이다. 어둠은 찬란했던 낮 시간의 영역을 사정없이 점령한다. 밤길을 걷는 이의 모습도 제각기 다르다. 소금
나는 연주자이며 음유시인. 우주가 갖는 뜨거운 심장에 귀 기울이고 그 맥박을 리듬으로, 울림을 멜로디로, 체온을 하모니로 하여 연주하는 거지. 이게 바로 우주 교향악이고 이 선율이 울려 펴질 때 지상은 더욱 아름답게 되는 거야.그래서 대지의 시는 그치는 일이 없어. 우리 종족은 산과 들녘에서 활동하는 부류와 나처럼 대중이 사는 인가에 들어와 활동하는 두 부류가 있지. 산과 들녘 대자연속의 부류들은 나보다 의미가 깊어. 지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대지의 귀뚜리들에게 모두는 경의를 표해야 해.그들과는 달리 대중이 사는 인가에 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