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들고 나서면 가슴이 설레죠. 꼭 소풍을 가는 어린아이처럼 흥분됩니다. 사진은 나의 인생입니다." 사진작가 이성근(69)은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하나가 된다. 강원도 태백산 정상 장군봉의 높이는 1천567m. 그는 장군봉에서 마치 하나의 바위가 된 것처럼 원하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질 때까지 기다린다. 해가 질 때까지, 달이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정신을 집중해 먹을 간다. 벼루에 닿는 먹의 밑바닥 면이 칼로 단번에 잘라낸 듯 고르고 반듯하다. 서예가 최부림(52)은 이렇게 먹을 갈아서 하룻밤을 재운다. 찌꺼기가 밑바닥에 가라앉으면 윗부분의 먹물만 조심스레 떠낸다. 그 먹물로 글씨를 쓰면 짙은 은빛이 난다. 그렇게 정성들여 명도와 채도 모두 만족할 만한 먹물을 만들어 글을
"풀 먹인 연실에 내 마음 띄워 보내 저 멀리 외쳐본다. 하늘 높이 날아라. 내 맘마저 날아라. 고운 꿈을 싣고 날아라." 소리쳐 부르면 가슴까지 다 시원해지는 노래 '연'의 가사이다. 누가 처음으로 연을 날렸을까. 그는 어쩌면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을 꾸다가 연을 발명했을지도 모른다. 연날리기는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귀농을 꿈꾸었지요. 자연 속에서,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따르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지도 생각했지요. 그것이 천연염색이었습니다." 천연염색공예가 김철희(61) 씨가 한림면에서 '생태체험학교 참빛'을 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천연염색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 삶의 자세가 바뀐다고 말했다. 아내 배인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또한 살아야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부산 온천장 길을 걷던 '청년 탁원대'의 눈에 도자기 전시판매장이 들어왔다. 진열장에 비치된 도자기에는 분명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다!" 청년 탁원대는 무작정 도자기 전시판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도자기와 만난
"붓글씨를 쓰다보면 흐트러진 마음이 가다듬어집니다. 정신을 맑게 하고, 집중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곧고 아름다운 뜻을 담은 글귀를 쓰는 것은 마음 수양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이 서예의 좋은 점이지요." 서예가 송우진(67)씨가 2000년에 문을 연 '진례서도원'은 서예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들이 찾아와 글을 쓰는 공간이다. 진례서도원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에서 생선을 팔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엄마가 왜 저기서 생선을 팔고 있지?" 무용과를 다니던 대학생 딸은 어머니의 속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며칠 후 어머니는 딸에게 무용콩쿠르대회 참가에 필요한 경비를 내밀었다.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감사히 받은 딸은 한국무용가가 됐다. 이영실(40) 씨의
"춘향전 한 자락 읊어보시게." 아버지가 부탁하면 어머니는 "지겹지도 않소"하면서 판소리 한 대목을 펼쳤다. 밤마다 안방에서는 판소리 안방극장이 열렸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수궁가…. 어머니의 소리를 통해 판소리를 자연스럽게 익혔던 소녀는 자라서 민요를 부르는 소리꾼이 되었다. 우인덕(57) 씨는 은쟁
인류가 수렵채집생활을 벗어나 농사를 기반으로 한 정착생활을 시작했을 때 가장 중요하고 필요했던 기물은 식량을 담아두고, 식수를 담을 수 있는 것 즉, 용기였다. 인류는 처음에는 구덩이, 풀, 나무 등을 이용하다가 흙을 물에 개어 그릇의 형태로 만들어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흙그릇이 불에 타고 나면 더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안 뒤론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을
관광지에서, 작은 인두로 나무의 표면을 지져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장면을 본 적이 있으신지. 쇠로 된 인두를 불에 달구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이 그림을 인두화, 낙화(烙畵)라고 한다. 나무를 태운다고 해서 영어로는 '우드버닝(Woodburning)'이라고 한다. 문화재청은 인두를 불에 지져 대나무나 나무 등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넓은 의미로
열다섯 살 소년은 도자기 요에서 장작 패는 일을 했다. 소년은 어느 날 창문 너머로 발물레를 돌리며 도자기를 빚는 사람들을 보았다. 소년은 그 모습에 반해버렸다. 그 짧은 한 순간이 소년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조선 차사발을 만드는 임만재(46) 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임만재의 '정호가마'를 찾아가보았다. 조선 차사발을 향한 지난날의 열정들죄다 부
한지공예를 처음 배우러 간 날. 기초과정은 작은 접시부터 시작하는 게 일반적인데, 겁도 없이 팔각상부터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팔각상을 완성했다. 그렇게 한지공예를 만난 게 인연이 돼 한지공예가의 길을 걷고 있는
한 땀 한 땀 촘촘하게 뜬 바느질이 한 줄로 곧게 이어졌다. 그 줄들이 또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늘어섰다. 누비 한복 한 벌 만드는 데 도대체 얼마만큼의 바느질을 해야 할까. 우리나라 손누비의 특징은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이 지도록 곧고 촘촘하게 홈질로 바느질을 하는 것이다. 방한과 내구성, 실용성이 뛰어난 바느질법이다. 여인들의 정성과 정
관공서나 은행 근처에서 도장을 파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미처 도장을 준비하지 못한 관공서 민원인들이 급한 마음에 인근의 자그마한 도장 가게에서 싼 목도장을 파던 시절이 있었다. 그 목도장은 용도가 다하면 금세 잊혀지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 이름 석자를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판 예술적 인장이라면 그렇게 쉽게 잊힐 리가 있을까. 서예와
'기슭을 내닫던 꿈/ 종이배에 띄워 놓고/ 밤이슬 맞는 산하(山河)/ 굽어 돌아 흐르는 강(江)/ 어쩌다 침묵을 배워/ 안으로만 흐르는가// 겨울바람 불어오면/ 얼음 되어 가슴 죄고/ 소나기 내린 날은/ 울음으로 지샜거니/ 어느 뉘 그의 흐름을/ 체념이라 이르리// 둥근 해 솟는 세월/ 굽이마다 외로워도/ 바위 갈아 새긴 인고(忍苦)/ 전설처럼 흐르는 강
"이건 내거야. 나중에 내가 커서 결혼할 때 가져 갈 거야!" 큰 딸이 먼저 엄마가 한지공예로 만든 콘솔경대를 '찜'했다. 선수를 빼앗긴 둘째 딸은 기회를 엿보다가 엄마가 이층장을 만들었을 때 재빨리 나섰다. "언니야, 이제 이건 내거야!" 두 딸아이가 서로 가지겠다고 다툼을 할 만큼 예쁜 공예품들을 만들어내는 한지공
옻칠공예가이자 옻칠화가 천병록과 '대성공방'옻나무에서 채취하는 유회백색의 유액상 수지를 생칠이라 한다.채취 직후의 생칠은 공기를 만나면 흑색으로 변한다. 옻칠은 한국과 중국·일본에서 예로부터 금속이나 목공 도장용으로 가장 소중히 여겨왔던 도료이다. 최근에는 생산량이 적고 비싸기 때문에 주로 미술공예품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페인트나 에
서양화가 박점숙과 '프로아뜰리에'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앳된 처녀가 오래된 목조건물 2층에서 초등학생 6명을 데리고 미술학원을 시작했다. 함께 그림을 그리고, 함께 놀다보면 아래층 사진관 주인이 긴 막대기로 천정을 툭툭 쳤다. 그러면 2층 바닥으로 소리가 전해져왔다. "얘들아, 조용히 해!" 잠시 그렇게 웃음을 죽이고 있다가 또 그림을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다, 사람의 마음은 글씨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서양에서는 글씨를 쓸 때 동물의 뼈나 쇠 같은 단단한 도구를 갈아 사용했지만, 동양에서는 부드러운 털을 사용했다. 붓을 먹물에 적셔 글씨를 쓰는 것이다. 붓으로 글씨를 써보면 알겠지만, 좀체 마음먹은 대로 붓을 놀리기 힘들다. 애초
'은하사에서' '김해 초선대' '가을 섬진강' '감포 앞바다' '황강' '소록도에서' '거문도' '동해안 야행' '남해 바래길' '백두산 기행'…. 여행책자의 제목들이 아니다. 이동배(60) 시조시인의 시조 제목들이다. 그의 시조집 (고요아침 펴냄)을 펼치면 한번쯤 들어보았거나 가보았던 장소